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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인 리호

[단문] 태허

..,,,..,.,., 2016. 6. 24. 06:38

 

 

 

태허(太虛)

 

w. 리네 

 

1.

 

이렇게 썩어빠진 기관이 소울 소사이어티를 지배하고 있다니, 우리가 이런 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니. 수치입니다. 어찌 호정대가 중앙에 고개를 숙일 수가 있습니까?”

 

썩어빠진기관이사이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고, ‘고개를숙였다니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기 익는 냄새가 지독하다. 애초부터 쓰질 못하는 다리를 몇 번이나 지져 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밧줄에 묶여 물을 맞은 채 파르라니 입술을 떠는 죄인을 보고 시호인 리호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후계자, 라가 있었다.

 

글쎄, 어찌 그럴까. 네가 생각하기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으냐?”

 

대답을 하고는 리호가 손짓하자,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인두가 허벅지에 올려 지기 직전이다. 죄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길게 내지르는 비명이 처절하다. 처음부터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없더라도, 애초에 갖고 있던 것을 빼앗기는 데에 대한 고통은 참질 못하는구나. 딱 그 정도의 그릇이로고.

 

여인은 뒤돌았고, 고문실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야차가 문을 열었다. 뒤에서는 계속 고기 익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좀 질 낮은 농담을 할까 하다가 (어디서 잔치를 하는가보구나, 상 차리는 내음이 여기까지 오는 것을 보면 말이야.) 입을 닫았고,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고문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가 예를 갖추자 라가 여인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숙여 리호의 발끝을 보았다. 그녀의 검정 비단이 그림자와 이어져 바닥으로 늘어졌다. 고기 내음과 꽃의 향은 잘 섞이질 않는다.

 

2.

 

키리, 용건비를 이리 불러 오거라. 그래, 자재음도 함께.”

, 리호님.”

 

키리가 뒷걸음질해 집무실을 빠져나가면 라는 리호의 곁으로 가 앉았다. 리호는 손을 뻗어 라의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숨을 죽였다.

 

시바사키 가문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느냐?”

 

리호의 물음이었다. 여인은 다정한 눈빛으로 제 후계자를 보았으나, 답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를 조금 시험해보기 위한 질문일 뿐이다. 라는 불을 담은 눈동자 속에 무엇인가를 자꾸 떠올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백 년이 지나면 그 뿐이겠어요. 천하에 제가 모를 것이 리호님 의중뿐이겠죠.”

 

리호는 빙긋 웃었다. 애초에 그것을 알 수 없음에도 던진 질문이니 라가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싶었다. 그녀는 늘 발전하기를 원했고, 또 깊은 야망을 은근히 드러낼 줄을 알았다. 그래, 무릇 자리를 이어받을 자는 겸손과 야망을 함께 드러낼 줄을 알아야 한다. 여인은 제 후계자가 마음에 들었다. 참 오래 찾아다닌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 그리 되겠지, 하고 말을 했을 때 집무실 문 밖에서 키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호님, 용건비 공과 자재음 공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용건비와 자재음이 키리의 앞에 서 있었다. 검은 하오리가 우슬착지를 하느라 펄럭여 허공을 날았다. 집무실 문은 다시 조용히 닫혔고, 키리가 소리 없이 걸어 리호의 옆에 와 섰다. 여인은 검붉은 입술을 움직인다.

 

시바사키 가문의 불법 사병 주둔지를 알아내 오거라. 시간은 그리 길게 주지는 않을 것이야. 그래, …… 이틀이면 되겠지.”

 

존명.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또 굵직한 목소리로 충성을 표했다. 이만 가보라는 여인의 말을 듣고는 동시에 일어나 뒷걸음질해 사라졌다. 집무실에 꽃 향이 지독하다. 라와 이야기를 나누겠노라 하는 여인의 말에 키리가 다과상을 차리러 나서면 소녀는 조용히 두 손을 들어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여인이 또 무엇을 물어올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는 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라는 늘, 여인의 예상대로 대답했다. 일의 시작은 이틀 전의 해 뜬 낮이었다.

 

3.

 

점심 식사를 하기 전 리호는 늘 약술 한 잔을 마셨다. 크기가 좀 되는 술잔에 약술을 따라 마시고는, 의자에 기대어 조금 눈을 붙였다. 잠들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녀에게 제법 중요한 일정이었고, 그래서 늘 그 시간에는 집무실에 따뜻한 약술 향이 돌았다. 꽃내음이 더욱 진하여 그렇지.

 

그 시각 라는, 시바사키 가문의 별채에 와 있었다. 그 날도 언제나처럼 풀빛 기모노에 녹색 면의를 쓴 모습이었는데, 가을 단풍이 죄 소녀에게 와 있는 듯 보였다. 그 앞엔 가부좌를 틀고 앉은 호탕한 여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시바사키 호즈미이며, 가문의 젊은 당주였다. 짐짓 불만이 있는 얼굴을 대하면서도 소녀는 웃었다. 시호인 리호에게서 배운 웃음이다.

 

하여, 고작 그 정도의 이유로 지원금을 물리셨어요?”

 

리호와는 달리 라의 말투는 독기가 강했다. 톡 쏘아붙여 물어 놓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상대를 기죽게 하는 것이 그녀였다. 말을 하지 못하던 생전과는 제법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이미 제 전생의 일을 많이 잊고 있었으나, 상대를 쏘아붙이며 말을 내뱉을 때에는 이따금씩 말 하는 것에 대한 희열을 느꼈다. 허나 시바사키의 당주 또한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이유?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돈을 쓸 수 없는 성정이지. 어찌 우리 가문이 정령정에 꼬박꼬박 지원금을 갖다 바쳐야 하는지 네년이 그 잘나신 입으로 떠들어 보거라.”

무례하시네요. 이년은 감리관의 명을 받고 이곳엘 왔습니다. 예라곤 배워먹질 못하셨나보군요?”

 

시바사키 가문의 당주는 이 소녀가 참 당찬 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귀족이었으나 예를 갖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대로 말을 했다. 그런데 제 앞에 앉아 말을 거는 이 붉은 머리의 소녀는 참 사람 화 돋우는 법을 잘 아는 듯 보인다. 여인은 일단 라의 타들어가는 눈동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예를 갖추게 생겨먹었나? 그리 잘나신 문제라면 그 높으신 감리관이 직접 여길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야. 우리 가문이 상인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면 이 대우가 무어더냐?”

 

여인은 저가 앉은 자리의 방석을 팡팡 쳐가며 이야기를 했다. 검게 올려 아무렇게나 비녀를 꽂은 머리가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풀리자 투덜대며 주섬주섬 머리를 틀어 다시 비녀를 꽂았다. 그녀와 라 사이에 놓인 다과상은 둘 다 손도 대지 않은 채다.

 

망부께서 남기신 유언을 지키지 않을 셈이신가보죠? 자만이 하늘을 찌르십니다. 예부터 어른의 말씀을 섬기면 저절로 복이 온다 했건만.”

 

그제야 라는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눈을 반쯤 내리깐 것이 참 꼴이 보기 싫다고, 호즈미는 생각했다. 입꼬리를 올린 채 내내 떨어뜨리지 않는 것 또한 같잖다. 저가 무어라고 높으신 분 행세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천년 묵은 구렁이 같은 여인이 후계자를 들였다더니, 그 년이 이 년인가 보지? 가당치도 않군.

 

애초에 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어린 속으로도, 돌아오는 것도 없는 데에 쓰는 돈이 아까워 죽을 듯 했어. 허나 이젠 내가 이 시바사키 가의 당주이며, 내 지휘 하에 모든 일을 운영할 수 있으니, 당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내게서 지원금을 받아갈 생각이면 날 설득해 보거라, 네년이. 아니, 감리관을 데려오너라. 허면 내 이야기라도 들어 주지.”

 

거 참 고집이 센 여자라고 라는 생각했다. 호즈미는 좀 비틀어 앉아 라와 아예 눈을 맞추지 않았고, 담배에 불을 댕겨 물었다. 손님 앞에서 예라곤 하나도 없는 꼴이 가관이다. 다리도 시원하게 내 놓은 것이 도저히 손님을 맞는 당주의 차림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가져다 놓은 다과상 또한 푸대접을 하려는 의중이 선연히 드러났다. 마시라고 내온 녹차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좋지 않은 내음이 났다. 이것은 명백히 그녀를 무시하는 행사였다.

 

라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주 듣지 않겠다는 의사가 확연히 보인다. 문 앞에 선 시종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려 있었다. 겁을 먹었겠지. 선대 당주에서부터 모셔왔는지 나이가 지긋한 얼굴인데, 새 당주의 무식한 행보가 얼마나 속이 터질까. 라는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어버렸다.

 

, 이제 네년이 아주 내 앞에서 웃기까지 하는구나. 감리관의 명을 받고 왔다고 내가 겁을 낼 줄 알았더냐? 네년에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았어? 나는 아버지와 달라 떡고물 떨어지지 않는 데에 머리 조아리는 짓은 할 수가 없으니,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야.”

그러시면 아니 되지요.”

 

이 목소리는 시호인 리호의 것이었다. 기가 차 웃고 있던 라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문은 그대로 닫혀 있는 채였다. 늙은 시종도 두리번거리다 창문 쪽을 보고 급히 문을 열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여인의 그림자가 있었다. 라가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놀라긴 호즈미도 마찬가지였으니 물고 있던 담배를 걸이에 걸고 창문 너머의 여인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래, 저년이 또 여길 왔구나.

 

창문 너머로 넘실대던 그림자는 곧 사라져 열린 문을 통해 여인이 들어왔다. 시종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기별 없이 찾아온 라를 대하는 당주의 태도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어찌 불안하다 싶더니 감리관이 훅 들어와 서슬 퍼런 눈빛을 빛내는 것이 이제 꼼짝 없이 망했구나 싶다. 그래도 뭘 어찌 해보겠다고 아랫것을 시켜 분주히 귀한 음식을 내오라 했으나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젊은 당주가 실언을 했다.

 

오셨소, 감리관. 내 감리관을 기다렸지. 이런 애송이를 보낼 리가 없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 당주께서 절 찾으실 것 같아 제가 늦게나마 출발했지요.”

 

그녀는 저가 전까지 늘어놓았던 독설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원금을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일전 라가 앉았던 자리를 손가락질했다. 거 앉으시오. 참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는군.

 

여전히 그 성정은 변하질 않으셨군요. 호쾌한 모습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이리 한 가문의 어엿한 당주 자리에도 오르시고, 제법 어른의 모습을 갖추셨어요.”

 

두 여인이 얼굴을 마주한 것이 거의 백 년 전의 일이었다. 선대 당주가 병사하기 전 그녀가 지원금 이야기로 이곳엘 온 것이 마지막이니, 그때에는 어린아이 태를 벗지 못했던 소녀가 이리 여인이 되어 시호인 리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리호는 면의를 벗어 손에 들고 라가 앉았던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라가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곧 한가득 차린 다과상이 새로 들어와 이전의 초라한 상을 물리고 그 자리에 새 상이 놓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호즈미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여인은 여전히 빙긋 웃고 있었고, 라는 당황한 표정을 여적 감추질 못했다.

 

그만 진정하거라. 내가 여길 온 것이 그리 놀랄 일이더냐.”

 

리호의 웃는 소리에 라는 금세 아니라며 대답을 하고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리호를 보면 일단 마음이 착 가라앉았고, 무엇이든 좀 더 자신감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옆에 앉은 여인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이제 겨울이 다 와 가는 날씨에는 맞지 않는 이질적인 향이다.

 

시바사키 공. 오늘은 말씀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담소를 나누는 것쯤은 괜찮으시겠지요?”

상관없습니다. 내 감리관이 오질 않아 서운했지. 올 것이면 미리 언질을 주지 그랬소.”

 

호즈미는 이제야 좀 기분이 풀렸다는 듯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다. 리호는 새로 들여온 다과상에 놓인 찻잔을 들어 기울였고, 따뜻한 꿀 차의 향이 좋다며 빙긋 웃었다. 방 안의 영압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동안 저는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만,”

 

여인은 이렇게 운을 떼었다. 호즈미는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고, 여인은 시선을 화려한 다과상에 두고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자를 참 많이 보았지요. 특히, 힘에 대한 과한 욕심을 가진 자들 말입니다.”

 

그녀의 말끝에 늙은 시종도 호즈미도 얼굴이 굳었다. 여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법 사병에 관한 이야기겠지. 뻔하다. 호즈미가 정령정엔 알리지 않고 단계를 넘어온 루콘가 주민들을 납치해 불법 사병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어언 십 년째였다.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그것을 덮어놓은 것은 시호인 리호였다. 이 모습을 보면 그녀의 남동생이 무어라 말을 할까.

 

불법 사병을 소유하고 계시더군요. 주둔지는 두 해에 한 번씩 바뀌었고요. 그 수가 사백이 넘는 병력이니 호정의 부대 하나와 같은데, 제가 모를 줄 알고 계시었다니 당주의 그 오만함도 여전하시어요.”

 

틀어 올린 머리 위에서 나비가 춤을 추고, 산호와 황옥이 빛을 냈다. 값지기로는 호즈미의 비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그 행색이 달랐다. 여인은 밤을 담은 눈동자로 시바사키의 당주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웃는 입꼬리가 버들과 같으니 참 웃기게도, 그것이 그리 무서울 수가 없다. 호즈미는 무어라 말을 하질 못해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인이 눈을 굴려 라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감정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을 읽어낸 라는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확 숙였다.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어졌다. 추한 모습을 보여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제 후계자를 험히 대하셨지요.”

 

이제 목소리는 완전히 사막과 같았다. 타는 모래가 호즈미의 입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목이 타서 그녀는 찻잔을 들어 꿀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뜨겁지도 않은가보다며 라가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 뜨거운 것을 알 리가 없지. 여인의 영압이 숨 막힐 정도로 강해져 왔다. 아예 입을 벌리고 모래를 억지로 넘기게 하는 것처럼.

 

이제 봐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주? 내일 이곳에 은밀기동을 보내겠습니다. 준비를 하시어요. 옥은 바닥이 찹니다.”

 

리호는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호즈미가 넋을 놓은 채로 여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다가, 황급히 찻잔을 놓고 저도 함께 일어섰다.

 

아니, 감리관, 그리 급히 가면 어쩌나. 앉아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가시오.”

무슨 이야기를 더 해 드릴까요? 옥엘 갇힌 적이 없어 겁이 나십니까.”

 

리호의 말에 호즈미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당장 시바사키 호즈미를 죽이지도 않았고, 또 손에는 검 한 자루 들려 있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 화가 나는데도, 호즈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제게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다. 비운 찻잔을 던지기에도 참 모양 빠지지 않는가. 호즈미는 그저 이만 빠득댈 뿐이고, 함께 일어난 라는 리호의 뒤를 따르며 여인을 뒤돌아보았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가 또 풀어지게 생겼다. 라는 다시금, 리호에게서 배운 미소를 지었다. 저년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싶다고 호즈미는 생각한다.

 

뭐야, 정말 그냥 가 버리는 거야?’

 

여인과 소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호즈미는 그제야 좀 진정을 할 수가 있었다. 늙은 시종이 아직도 겁먹은 표정으로 당주를 살피고 있다. 화려하게 차려 놓은 다과상이 보기 싫어 그녀는 발을 써서 다과상을 확 엎어 버렸고, 그 바람에 비싼 과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리호와 소녀가 비우지 않은 찻잔에서 꿀 차도 함께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두 해마다 주둔지가 달라지는 것은 또 어떻게? 빌어먹을 년들.

 

4.

 

시바사키 호즈미를 포박할 은밀기동 소대를 보내는 것은 미시의 일로 결정이 났다. 어째서인지 은밀기동의 일정이 꽤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기 때문이었다. 중앙 46실에서는 야차를 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 나왔는데, 그녀는 그 질문에 야차들 또한 다른 일이 있어 사정이 좋지 않다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밤이 되어서야 목욕을 할 수 있었다. 그 밤에는 별이 아름답게 떴고, 가을바람이 차게 불었다. 시호인 리호의 욕실에는 여인과 함께 모로하시 타카히로가 있었다.

 

요즘 일이 많으십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지요.”

헌데 중앙에서, 야차의 사정이 좋지 않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타카히로는 욕조 안을 가득 메운 여인의 길고 검은 머리 위로 꽃잎 몇 장을 올려 보았다. 검정 밤하늘에 붉은 별이 핀다. 몸을 씻기던 손길이 조용해지자 여인이 눈을 떠 뒤를 돌았고, 타카히로와 마주보았다. 웃을 때에 혜성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그녀가 저를 욕보였답니다.”

? 감리관을요?”

제 아이를 욕보였지요.”

 

하여 손을 좀 봐 줄까 합니다. 여인이 말하는 제 아이는 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로하시는 자신의 수양딸이 여인에게 제 아이가 아닌 것이 조금 서운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부드러운 천으로 여인의 몸을 닦아 내렸다. 꿀 향이 가득한 물 위로 하얀 김이 올라 욕실을 뜨겁게 데웠으나, 여인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았다. 가만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데, 그 얼굴이 짐짓 화가 나 보였다. 여인은 가끔 화를 냈다. 자신을 욕보이거나, 자신의 아이를 욕보이거나, 혹은 사별한 남편을 그러하거나, 하여간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시호인 리호가 역정을 내면 모로하시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도 꼭 그런 모습이라, 어느새 손길이 떨리는 것을 느낀 리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떨지 마시어요.”

…… 송구합니다.”

 

모로하시는 심호흡을 하고는 진정한 손길로 다시 여인의 몸을 닦아 내렸다. 따뜻한 물에 젖은 수건은 부드럽게 여인의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또 올라와 이번에는 오른팔을 쓸었다. 그는 종종 부인의 몸을 이리 씻겨 주었다. 잠자리를 함께 한 지는 오래 되었으나 (여인은 제 나이 칠백을 넘긴 후부터 밤을 혼자 보냈다.) 이렇게 그녀가 여인의 몸을 자신에게 맡기는 것이 그는 좋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정부로 받아들여주는 것만 같아서.

 

내일은 또 무슨 안건으로 회의를 하시는지요.”

귀도중에서 예산을 재편성해 달라는 안건이 올라왔습니다. 쓸데없는 데로 돈이 새어 나간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바쁘신 모로하시 공을 제가 붙드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여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으나, 그녀는 제법 예의를 차려 정부를 대했다. 이런 일반적인 연인 관계를 흉내 내는 말 한 마디로도 모로하시는 웃었다. 탐욕과 피곤에 젖어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평소의 그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감리관의 목욕 수발을 드는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어린아이 같으시군요.”

 

제가 감리관 앞에만 있으면 꼭 이리 됩니다, 하며 모로하시가 연신 낮게 웃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 좋은지, 처음 여인에게서 유혹을 받았을 때에는 서툴고 어색하던 목욕 수발이 이제 제법 솜씨가 붙어 있었다. 그 나름대로 시종들에게 목욕 수발 드는 법을 교육받았다고 부끄러움도 없이 말했던 기억이 났다. 리호는 물을 떠 얼굴을 씻었고, 꿀 향이 달콤하게 퍼졌다. 여인은 제법 기대하고 있었다. 후일의 아침을.

 

5.

 

묘시가 되자 스산한 움직임이 정령정 동쪽에서 있었다. 백 명 남짓의 무장한 병사가 줄을 지어 청류문을 향해 진격하는데, 청류문 바깥에 호로 처치를 위해 파견되었던 10번대 일반대원 스무 명이 목이 따여 죽었다. 그것으로 정령정에 비상경보가 울렸고, 대수 회의를 연다고 야마모토의 전령이 왔다. 여인은 이미 일어나 있었는데, 시종을 시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의복을 갖춰 입은 뒤 방을 나섰다. 시호인 리호가 1번대 회의실로 이동하는 사이에 대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녀가 회의실 문 앞에 섰을 땐 이미 대장들이 모두 돌아가 있었다. 야마모토 겐류사이 시게쿠니는, 여인의 영압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여전히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기다려 주시었네요, 총대장님.”

무슨 할 말이 있어 이 새벽에 찾아왔는가.”

오래간만에 전선엘 좀 나가볼까 하여 찾아왔지요. 요즘 검 쓸 일이 적지 않았습니까. 마침 딱 좋은 전장이 생겼군요.”

 

딱 좋은 전장은 무슨. 이 전장은 애초에 그녀가 만든 것이었다. 시바사키 호즈미라면, 분명 이리 나올 줄을 알고 있었으니. 승률이 없는 공격이라도 제 분을 풀어보겠답시고 정령정에 반역을 꾀할 것이니. 그녀를 죽일 명분을 위해 깔아놓은 포석에 중앙이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뻔히 속이 보이는데도 무어라 할 말이 없어 야마모토는 끙, 속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리 하라고 답했다. 빙긋 웃는 여인은 손에 참백도를 들고 있었다.

 

청류문 앞에서 일어난 기습에 7번대 대장이 이백의 군대를 이끌고 향하는 중이었다. 새벽에 벌어진 일에 긴급 출동인지라 반절은 넋이 나가 있었고, 반절은 순보를 해 가며 옷매무새를 다듬는 꼴이 한 동안 전쟁이 없었다고 나사 하나 빠져 있는 모양이다. 여인은 청지기도 두지 않고 홀로 순보를 써 청류문으로 향했다. 이미 선발대로 혼백 부대가 밖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시바사키 가문이 귀족이 된 이후로는 방패 만드는 사업을 했다더니 그것이 제법 쓸 만해 보였다. 확실히, 귀도를 쓰지 못하는 혼백 군인을 막기에는 좋을 듯하였다.

 

7번대 군대는 리호가 청류문 주변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본 지 서너 분 만에 도착했다. 7번대의 젊은 대장은 그 자리에 오른 지 겨우 서 달 남짓 된 자였는데, 군을 지휘하지 못해 쩔쩔매는 것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8석의 자리에 앉아 호로 토벌을 돌다가 만해를 습득하여 바로 대장에 올랐으매 명령을 받으며 움직인 적은 있어도 전장을 지휘하는 역할은 해 본 적이 없겠지. 여인은 다시 청류문 너머를 보았다. 시바사키의 사병들이 커다란 방패를 들고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무장을 해 제법 몸이 무거울 텐데도 끄떡없어 보여 그녀는 그 사병을 조금 탐냈다. 납치한 자들을 굶기진 않은 모양이로구나. 저 기상이 심히 제법이야.

 

방패를 들고 뛰는 적군 사이에 시바사키 호즈미가 있었다. 자색 두건을 매고 무장을 하였으며 말을 타고 달리니 그 모습도 꽤나 위엄이 있다. 여인은 잠시 더 두고 볼까 하다가, 군을 지휘하지 못해 쩔쩔매는 7번대 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석 달 전 얼굴을 보았던 여인의 등장에 급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전장에서 나를 보았다고 이리 달려오시다니, 무르시네요.”

 

여인은 웃음과 동시에, 그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어오는 그를 보고는 싱긋 웃는다.

 

전선에는 제가 설 테니, 물러나라 하였어요. 선발대에게도 징을 쳐 그리 전하십시오.”

 

그는 리호가 두 번 말한 후에야 급히 본군에게로 갔고, 그의 지시에 대원 하나가 청류문을 통해 뛰어나가 공중에 서서 징을 쳤다. 세 번 치는 것이 후퇴의 신호이니, 검이며 창이며 무기를 들고 싸우던 혼백 부대의 군인들이 싸우던 것을 멈추고 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온다. 시바사키 호즈미는 저 겁쟁이들의 꼴을 보라며 호탕하게 웃어젖히다가 청류문 바른편의 허공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오만상을 썼다. 그러고는 외치기를,

 

화풀이나 할까 하였더니 큰 놈이 굴러 들어왔구나! 저 구렁이 목을 쳐 오는 놈에겐 내 큰 상을 내릴 것이야!”

 

하니 반란군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여인에게로 달려는 왔으나, 허공을 딛지 못하니 손을 쓸 도리가 없다. 그 꼴이 참 웃겨 여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동이 트는구나. 시호인 리호는 참백도를 빼어 들었다.

 

아귀.”

 

여인은 애인을 부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해를 해방하였으니, 그녀의 시해에 대해 알 도리가 없는 호즈미는 저 허공에서 그녀가 무어라 하는지를 듣지도 못하고, 말을 달려 하늘을 향해 석궁을 쏴 댔다. 여인은 반란군 수장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에 허공에서 내려와 청류문 앞에 섰는데, 방패를 무장한 반란군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7번대의 젊은 대장은 대원들과 함께 청류문에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승전보를 기다린다. 여인이 검을 들어 허공에 팔을 쭉 펴고, 왼편에서부터 바른편에 이르기까지 수평으로 휘두르니 검의 끝에서부터 회빛 안개가 몰려 퍼졌다.

 

이제 반란군의 반이 넘는 수가 여인에게서 열 발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별안간 그들이 목을 틀어쥐며 휘청하여 주저앉았다. 누구는 목을 손톱으로 벅벅 긁느라 바쁘고 누구는 소리를 지르려 안달을 하고 누구는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쥐었던 검이며 방패를 놓쳐 우니 반란군 수장은 당혹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말을 타고 달려오려다, 그 쓰러진 놈들 위의 허공에 회빛 안개가 있는 것을 보고 오기를 꺼려 하니, 쓰러져 말도 하지 못하는 반란군 몸뚱어리를 밟고 여인이 호즈미에게로 다가갔다. 아직도 그들이 무엇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수장과는 달리 용감한 병사 한 명이 검을 쥐고 무작정 달려들었는데, 여인이 쥔 참백도에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러한 것을 보니 다들 선뜻 덤비기를 꺼린다.

 

여인이 지나온 자리에는 반란군 병사들이 아직도 움찔대며 발작을 했으나 그 중 누구도 검을 들고 시호인 리호에게 덤비는 자가 없다. 말을 하지 못하여 그렇지 그들은 배고픔을 호소하거나, 혹은 그로 인한 어지럼과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쓰러져 눈이 마주친 두 병사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서로 눈빛으로 말을 했다. 아무도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그 목구멍에서는, 숨을 쉬지 못해 꺽꺽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어서 오셔요, 당주. 내 시바사키 공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구렁이 같은 년.”

 

그것이 시바사키 호즈미의 유언이 되었다. 여인은, 순보를 써 단숨에 적장의 목을 검에 꿰었다. 아직 말을 채 끝내지 못해 벌리고 있던 입 안으로 어느 샌가 여인의 아귀가 틀어박혀 있다. 가죽을 찢고 나온 검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대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몇 명이 뛰쳐나와, 살려달라는 말을 했다. 자신들의 마을이 피바다가 된 것에 겁을 먹어 숨어 있는 루콘가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여인은 개의치 않고 목 뚫린 적장 시체를 검에서 빼내어 뒷목을 틀어쥐었다. 얼굴에 튄 피는 소매를 들어 닦았으나, 제대로 닦이지는 않는다. 시체를 말에서 내리며 입을 열어 남은 반란군 병사에게 항복하라는 말을 하니 일제히 검이며 방패를 땅에 내던졌다. 본래 이들은 제 목숨 구하기에 급급한 이들이 아닌가.

 

시호인 리호가 손짓하자 7번대 대장이 여인에게로 제 군대를 보내었다. 그들은 항복하려는 반백 명 남짓의 죄인의 손목을 구속하거나, 선발대의 부상자를 부축하는 등의 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여인은 적장의 시체를 들고 아무 말이 없었다. 웃지 않는 얼굴이 섬뜩하였으나 그만큼이나 아름다워 아무도 여인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녀는 피가 쏟아지는 고깃덩이의 목을 틀어잡고 청류문을 향해 걸었다. 조금 걷고 있으면 뒤늦게 따라 온 키리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는데, 청지기 또한 숨이 끊어진 적군의 병사를 무더기로 밟으며 달리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녀는 다가와 주인에게서 시체를 넘겨받았고, 채비를 하자꾸나, 하는 말에 고개를 숙여 그리 하겠다고 답했다.

 

6.

 

시호인 리호는 돌아오자마자 피 묻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위로 면의를 덮어 썼고, 당장 채비하여 청지기와 야차 한 명을 데리고 정령정을 나섰다. 가마에 오르지 않고 정령정을 나서는 일이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이제 해가 중천에 떠 있어 새 지저귀는 소리와 가게 문 여는 소리가 시끄러운데, 그녀는 흑릉문까지 순보로 빠르게 이동하여 금세 시바사키 가의 저택 대문 앞에 섰다. 뒤에서 한 팔엔 청지기를, 한 팔엔 호즈미의 시체를 들고 따라온 야차는 제법 힘이 빠져 보였으나 여인은 여전히 서슬 퍼런 눈을 뜨고 저택의 대문을 열어젖혔다. 저택 마당을 쓸고 있던 여종이 누구시냐고 질문을 던졌는데, 그 뒤로 사내 목소리가 들렸다.

 

감리관이시지요, 들어오십시오…….”

 

시호인 리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시바사키 가문의 장남, 시바사키 카즈오의 것이다. 병을 앓느라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를 그녀는 100여 년 전 들은 적이 있었다. 작은 주인의 말을 듣고 여종이 급히 손님을 모셨는데, 별채가 아닌 작은 주인의 방문을 열었다. 여인은 놀라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카즈오. 이제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

 

여인의 말이었으나, 카즈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피 냄새가 나는군요.”

 

그와 동시에 여종이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곳곳에서 아랫것들이 무슨 일이냐 하며 뛰어 나오는 발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그들 모두가 소리를 지르거나 에구머니나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카즈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날 밤 제 누이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내 분해서라도 참고 살진 못하겠어!’

 

처음 비명을 내질렀던 여종이 바닥에 주저앉아 당주님!” 하고 외치자, 덜컥 겁이 났던 것이 현실이구나, 하고 카즈오는 먹먹한 심장을 확 쥐었다. 감리관, 감리관, 혹 누이가…… 우리 누이가,

 

묘시에 청류문 밖에서 10번대 대원 스물 남짓을 살해하였기에, 정령정에서 그녀를 벌하였단다. 사병 백여 명을 몰고 와 문을 향해 돌격하더구나.”

 

. 심장 내려앉는 소리가 리호에게까지 들리는 듯하였다. 태초부터 보이지 않던 앞이 더욱 깜깜하여 여인의 꽃향기 사이로 드러나는 피 냄새에 손을 떨고 있었으니, 그것을 보는 여인이 처연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놈 앞에서 표정 관리가 무엇에 필요할까. 야차가 호즈미의 시체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아랫것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이 볼 만 하다.

 

하여, 그녀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녀의 친족인 너를 은밀기동에서 포박하러 올 것이다. 그들이 올 때까지 어디 이야기나 나눠보자꾸나.”

 

목 뚫려 이제 피도 흐르지 않는 호즈미의 시체를 보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카즈오는 불같은 성격의 제 누이가 저지른 섣부른 행동에 대해 원망을 하려다가도, 피 냄새 풍기며 죽어있을 누이의 시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저택 대문은 야차가 막고 서 있으매 신속히 은밀기동이 도착하였으니, 그 동안에도 카즈오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 손을 구속당하여 흑릉문을 향해 질질 끌려간 죄인들이 시야 너머로 사라지면 시바사키의 저택에는 여인과 청지기, 정령정의 군대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피 묻은 것도 닦질 않았구나.”

 

여인이 자조하듯 말했다. 참백도를 직접 들고 있었고, 면의에 덮인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검은 천 너머로 밤을 칠한 눈동자가 살의 등등한 빛을 내는 것도 여전하였고, 높게 올린 머리에 꽂은 비녀에서 나비가 춤을 추며 봄을 노래했다. 지금은 단풍도 다 진 가을이거늘.

 

수색하여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거라. 사병의 주둔지 위치가 적힌 종이 같은 것이 있으면 더욱 좋겠지. 하나도 남김없이 수사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청지기가 고개를 숙였고, 곧바로 은밀기동의 대원 몇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제 여인은 자신의 후계자에게로 갈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가, 이번 사건을 해결해 보라는 말을 할 참이다.

 

7.

 

하여간 그리 되어 시바사키 카즈오는 죄인이 드나드는 흑릉문을 통해 정령정엘 잡혀 가야 했고, 지금은 이렇게 고문실에 꽁꽁 묶여 있는 신세인 참이다. 이제 다리에 감각이 없는 듯 했으나 불 달군 뜨거운 것이 와 닿으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기를 기십 번이었다. 목이 타 죽을 것만 같을 땐 친절하게도 고문관이 물로 그의 뺨을 때렸다. 지진 곳에 물이 닿아 황천길을 댓 번은 건넌 것 같다. 그러나 계속 입을 열질 않았는데,

 

별안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낮에 왔던 소녀의 영압이 느껴졌다. 감리관의 후계자라 하였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사병 주둔지를 물어보았는지 모른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다리를 지지라 명하고, 그러다 물을 쏟아 부어라 말을 하고, 그러기를 수십 번, 이제 카즈오는 제정신이랄 게 없을 상태였다. 사흘 동안 소금 탄 물만 마신 배가 고플 새도 없이 지진 살 위로 물이 튀면, 또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피가 줄줄 흘렀다. 라가 죄인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았고, 입을 열었다.

 

아직도 털어놓을 마음이 들지 않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다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카즈오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이 쉬어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 공기만 내뱉다가 이내 포기해버리려던 참에, 누군가에 의해 입이 벌려졌고, 목구멍으로 짠 맛 나는 물이 들어왔다. 목을 충분히 축인 후에야 잡힌 턱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기침했고, 또 침을 삼키지 못해 줄줄 흘렸다. 그것을 라는 의자에 앉아 가만 바라보고만 있다. 며칠 새에 그녀는 고기 타는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기침 하는 소리가 울리는 동안 누군가 고문실 쪽으로 다가왔다.

 

이자와 미요시. 은밀기동 함리대 소속으로, 시바사키 카즈오를 구속해 오던 일을 담당하던 자이다. 쭉 찢어진 눈매를 따라 그리듯 흉터가 나 있고, 눈썹을 죄다 밀어버린 모습이 사나워 보이는 자인데, 그 큰 덩치로 고문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라는 별 신경 쓸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심문을 계속하라 일렀다. 이자와는 고문 하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실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 무엇 때문에 오셨어요?”

은밀기동에서도 애를 태우고 있기에 경과를 보러 왔습니다.”

 

하기야, 사흘이 지났는데도 달리 말이 없으니 속이 탈만도 하지. 당주는 목이 꿰여 죽고 장남은 고문을 당하고 있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지고. 사병 주둔지 뿐 아니라 그들의 숨겨 놓은 재산 또한 그 근거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호정에서도 꽤나 애를 먹고 있었다. 라는 이미 다른 방안을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채비를 하여 루콘가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죄인에게서 무어라도 하나 실토하는 것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녀는 아랫것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잡혀 온 자들에게서 나온 정보가 일치하는지 들어보아야 했으니, 고문을 잠시 멈출 것을 명했다. 붉은 눈동자에 죄인의 비명을 오롯이 담고는,

 

도모지를 가져오세요.”

 

그 말에 카즈오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제 다 끝이구나 싶다. 그는 대부분의 고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그나마 알고들은 것이 있다면 도모지에 대한 소문인데, 젖은 종이를 얼굴에 덮어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고문이라 하였다. 불로 살을 지지는 것보다도 더욱 괴롭게 죽게 된다던 말을 그의 조부께서 살아 계실 적에 들은 적이 있어, 알고 있는 단어가 나오니 저절로 겁을 먹어 온몸이 빳빳이 굳었다. 입을 열어, 말아? 고민하던 것은 고문관이 도모지를 가져왔다는 말을 하자 다 소용이 없어 졌다.

 

서쪽, 서쪽입니다,”

 

그러자 소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입을 여시는 군요, 오래 기다렸어요. , 어디라고요?

 

서쪽 루콘가…… 28지구, 카데노코지 산의 두 번째 언덕을 넘으면…… 동굴…… 동굴이 있습니다.”

그 곳이 주둔지인가요?”

……. 그러니까, 도모지는……

좋아요. 오늘 심문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앞으로도 잘 선택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일은 곧바로 도모지부터 사용할 생각이니까요. 이자를 옥으로 이송하세요. 나는 감리관께 보고를 하러 가겠습니다.”

 

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뒤돌았으니 이자와를 지나쳐 그냥 고문실을 나가려는 것을 그가 붙들었다. 이번 일의 주도권은 라님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감리관께 보고를 하러 가실 겁니까?

 

주도권이 있든 없든 보고를 올리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이죠. 허니 이자와 공은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고 계세요.”

 

그러고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이자와는 죄인이 의자에서 풀려 쓰지도 못하는 다리의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가만 지켜만 보았다. 그 형형한 눈동자에 탐욕이 담기는 것을 이미 가 버린 라도, 눈을 쓰지 못하는 죄인도 알 수가 없었다.

 

8.

 

그래, 카즈오에게서 자백을 받아냈다지. 어디라 하더냐?”

서부 28지구, 카데노코지 산의 동굴이 사병 주둔지라 하더군요.”

하여?”

……코야마 상단엘 가 볼 생각입니다.”

 

여인은 만족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잘 하고 있구나, 그녀의 칭찬에 소녀는 화색이 돌아 수줍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들뜬 얼굴로, 지금 출발하겠다는 말을 하는 소녀를 보고 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가고 나면, 여인의 방에는 다시금 리호뿐이었다.

 

시바사키 호즈미를 단칼에 죽인 것이 못내 아쉽다. 팔이라도 하나 뜯어 놓고 죽여야 했음을, 뒤편에서 7번대의 군대가 지켜보고 있는 바람에 그러질 못하였다. 그래도 검에 목을 꿴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감히 나의 아이를 욕되게 하였으니, 옥에 처넣어 형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여인이 수를 쓴 대로 되었다. 반란을 일으켰다면 목숨 줄이 끊어져도 아무도 무어라 토를 달지 않지.

 

하여 그리 화 난 것을 풀어 놓았으니, 이제 얕보인 그녀의 후계자에게 일의 처리를 맡긴 것이다. 그녀는 소녀에게 이 일의 주도권을 넘겨주었지만, 처리하기에 좋을 정보 같은 것은 일절 주지 않았다. 여인은 라가 직접 모든 것을 해결하기를 원했다. 자신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그녀가 일을 잘 해결해 낸다면, 그 다음의 수순은 시호인 리호의 차례이다. 중앙의 재판에서 시바사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내어 그를 사형시켜야지.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키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손에 쟁반이 들려 있고, 약술 담은 술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다. 그래,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구나.

 

9.

 

말을 타고 달린 소녀는 동부 6지구의 커다란 저택 대문 앞에서 멈추었고, 그 뒤로 궤짝 하나를 등에 멘 놈이 따라 말에서 내렸다. 대문 앞에 서서 사내가 이보시라고 언성을 높이면 휘황찬란한 상단의 대문이 열리는데, 잘 차려입은 여종이 라의 얼굴을 보고는 참으로 오랜만에 오시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상단주 청지기 안에 있느냐.”

곧 모셔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어요.”

 

여종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저택으로 휙 들어갔는데, 곧 청지기가 나와 라를 맞았다. 내 지금 당장 상단주께 살 지재가 있어요. 그리 말을 하며 라와 함께 온 사내가 메고 있던 궤짝을 열어젖히니, 청지기는 흘깃 보고 단주의 방으로 소녀를 안내했다. 소녀가 코야마 상단엘 방문한 사이에 은밀기동에서는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이자와 미요시의 뒤로 대여섯의 기동대원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여, 정령정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방향은 백도문 방향이며, 문 앞을 지키던 잇칸자카 지단보의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도 답을 하질 않으니 개인행동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이자와의 뒤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탐욕에 목을 매는 족속인지라 아무런 불만이 없다. 그들은 재빠르고 또한 조용하게 이동하여 금세 카데노코지 산의 입구에 서 있다.

 

언덕을 둘 넘으면 동굴이 나온다 하였지. 속히 움직여 다른 자들보다도 우리가 먼저 공을 세워야 할 것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전령을 띄워 총사령관님께 보고하면 이번 일의 덕은 우리가 볼 것이야.”

 

하는 그의 눈동자에 형형한 탐욕이 빛나 흘렀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산을 올라 두 번째 언덕 너머의 동굴 앞에 섰는데, 동굴은 커다란 나무를 격자로 엮어 만든 문으로 잠겨 있으며, 주변에 수풀이 우거지게 자라나 입구를 가리고 있어 찾기가 제법 힘이 들었다. 나무 얽어 만든 문 너머로는 팻말이 하나 있는데, 불을 비추어 보니 절대 문을 파괴하지 말 것이라 쓰여 있었다. 그 너머로는 끝없는 어둠만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 사람을 처박아 놓았나.’

 

그는 이리 생각하다 고개를 휘 내저었다. 루콘가 외곽에서는 계곡 안에도 마을을 숨겨지었으니,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제 형제 다섯을 죽이고 사신이 되었다. 그 썩어가는 동굴 마을에 비하면 이쪽은 괜찮은 편에 속했다. 이렇게 나무로 입구를 막아놓은 것을 보면 다른 입구가 있을 법도 한데, 그들이 산을 몇 번이고 수색했으나 별다를 입구랄 것이 없었다. 이자와는 막힌 문을 뚫고 들어갈 생각을 했다. 나무가 썩어가지는 않는데, 좀 손을 쓰면 쉬이 부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 문을 부수고 돌입해야겠군.”

 

……이제 밖은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상단주의 응접실에 앉은 소녀는 조금 기다린 후에야 상단주와 마주할 수 있었고, 언제나처럼 장막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에 대고 입을 열었다.

 

시바사키 가문의 불법 사병 주둔지에 대한 지재를 사러 왔어요. 그들이 재산을 숨겨 두어 찾질 못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지재도 함께요.”

 

10.

 

그리하여…… 라가 코야마 츠키노에게서 지재를 구하는 동안, 서부 28지구의 산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다. 화재 현장을 발견한 야차군의 정보요원이 급히 여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서부 루콘가 28지구, 카데노코지 산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오전, 시바사키 카즈오의 자백이 있던 곳입니다……. 그것을 들은 여인은 우선 그리로 향한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카데노코지 산입니다, 이자와 미요시 외 기동대원들이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을 지단보가 보았다 합니다.”

 

. 소녀는 응접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이정대 대원의 말을 듣고 혀를 찼다. 그 뒤로는 상단주의 청지기가 어서 밖으로 나가시라고 고함 같은 말을 내지르는 것이 이어졌고, 그 동안 코야마 츠키노는 말이 없다.

 

아무래도 오늘 오신 목적과 관련이 있으신가보군요.”

 

사내의 목소리에 소녀는 찌푸리던 미간을 풀고 비로소 웃었다. 그렇지요. 어디의 멍청한 자가 사고를 쳤어요. 붉은 눈동자가 응접실을 훑어 오르자 코야마가 두꺼운 서책을 펴 몇 장 넘겼다.

 

감리관은 요새 오지 않으시는군요.”

상단주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다며 늘 저를 보내십니다.”

우선 저 불 난 산이 주둔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오신 것 같습니다만.”

. 하여 대기하고 있으라 말을 해 두었는데 저리 멍청한 짓을 하는군요. , 어디죠? 주둔지, 그리고 재산을 숨겨 둔 장소 말예요.”

……주둔지는 서부가 아닌 남부 28지구 솔숲입니다. 약 사백 명 정도의 사병이 올해 유월 말에 이동했군요. 재산을 숨겨 둔 장소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라님.”

?”

 

어째서 고작 이런 정보를 사겠다고 이 상단에 왔느냐는 물음을 하려다가, 코야마는 조금 에둘러 말하기로 했다(그는 어쩌면, 감리관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겁주려는 목적으로 그녀의 후계자를 보낸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리관은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으십니까?”

돈을 받고 지재를 팔면서 제게서 지재를 얻어내려 하시네요.”

그것이 상인의 일이니까요.”

, 이런 지재를 사 갈 사람은 없을 테니 말씀드리죠. 지금은 일종의…… 시험을 치고 있는 중이랍니다.”

 

, 그렇습니까, 하고 코야마는 단번에 이해했다. 종이를 또 몇 장 넘기어 숨을 고르더니, 그래, 여기 있습니다,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사이 감리관의 집무실에서는, 여인이 천도주 따른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에 우노하나 레츠가 앉아 차를 마신다.

 

역시 감리관은 아이 키우는 데에 재능이 있으시네요.”

내가? 레츠가 칭찬해 주니 기쁜데.”

그 아이는 잘 해 낼 거예요.”

그렇겠지. 내 아이인걸. 그 앤 성장할거야. 지금보다도 더.”

허나 감리관, 이번 일은 너무 티가 났어요. 고의였나요?”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야.”

 

리호는 아이처럼 빙긋 웃었다. 술이 달큰하여 취기가 오른다. 오늘은 벌써 세 병을 비운 채였다. 키리를 부르려던 것을 우노하나가 막아 세웠다.

 

이제 정리하셔요, 감리관.”

……그럴까. 내 오늘 기분이 좋아 그랬어. 오늘 뿐 아니라, 최근 말이야. 내 아이를 욕보인 자의 목을 꼭 꿰뚫어버리고 싶었거든.”

허나 중앙에서 눈여겨보고 있답니다.”

후후, 알고 있어. 괜찮아. 내 경계 대상이 거기엔 없는 거, 레츠도 알고 있잖아. , 카쇼 가 쪽이라면 모를까.”

밖에서 듣겠어요.”

 

우노하나가 집무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 말에 리호가 즐거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겁내는 척 하는 것 봐, 역시 레츠는 무서운 여자야.

 

레츠, 너무 걱정하는 척 하는 거 아냐?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잖아. 그들도 지금 날 경계하고 있을걸.”

 

여인은 일부러 소리 높여 말했다. 밖에 듣는 자라고는 야차뿐인데도, 그리 목소리를 높이면 카쇼 가문의 당주에게까지 말이 들릴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녀는 우노하나와 있으면 어린 장난을 자주 쳤다. 꼭 닮은 두 여인이 마주앉아 술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이제 밤이 되었고, 여인의 벗이 돌아간 적막의 집무실에 그녀의 아이가 돌아왔다.

 

11.

 

어허, 조용히들 하세요. 재판을 해야 하질 않겠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외쳤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바사키 카즈오는 법정의 중앙에 묶인 채로 앉아 있었는데, 거짓 자백은 하였으나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니 제 누이와는 달리 사형을 면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고문을 받으며 그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 부었다. 죽고 싶지 않다. 죽는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기를 바란다. 카즈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니 누이의 죽음이 떠올랐다. 시체를 두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차게 식었을 볼 한 번 만질 수 없었으니 귀족의 말로가 이리도 비참할 줄은 몰랐다.

 

제 형량을 늘이느니 줄이느니 하며 떠들어대는 현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는 며칠 째 소금물만 들이킨 상태였고, 애초부터 쓰지 못하던 다리는 고문 흔적으로 지저분했으며, 첫날 고문의 시작과 동시에 산발이 된 머리칼이 얼굴에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벌거벗긴 채 군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자들은 한참을 더 시끄럽게 싸워 대다가, 재판관의 책상 내리치는 소리에 침묵이 잠깐 찾아왔는데,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가 감정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하질 않았소, 방금!”

그럼 아니란 말인가! 자네는 늘 그런 식으로 형량을 늘이려 하지 않았나!”

거 조용히들 하시오!”

시바사키 호즈미는 반역을 꾀했으며, 저 놈은 거짓 진술을 하여 정령정을 우습게보았잖소! 당연히 형량을 더 늘여 본보기를 보여야 하지 않겠소!”

 

하아. 카즈오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것마저 저 높으신 분들에게 들킬까 겁이 나 크게 쉬지는 못하였다. 저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결국 형량의 문제는 어찌 되는 것인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 어디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참으로 쾌활들 하시네요.”

 

시호인 리호의 목소리이다. 이제 카즈오는 여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이 늙어빠진 정령정에 멀쩡한 얼굴로 농을 던지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듯 보인다. 여인의 뒤로는 후계자의 영압 또한 느껴졌다. 저 기분 나쁠 만큼 카랑카랑한 영압을 잊을 수가 없지.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리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앙은 일순 쥐 죽은 듯 고요함이 흘렀다.

 

무엇 하셔요. 더 떠들어 보시지요.”

저 구렁이년이…….”

입은 조심하시구요.”

 

누가 이빨 빠득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즈오는 이미 주먹 쥔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과, 인두로 지져졌던 허벅지 살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또 뜨거운 것을 몸 아무 데에나 가져다 댈 것 같다. 그러나 여인의 영압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졌고, 리호는 법정의 구석에 가 섰다. 현자가 아닌 그녀의 자리는 늘 그곳이었다. 중앙 법정의 어디에 교정관리관의 자리가 있으랴.

 

그러나 법정의 구석에 여인이 있으면, 실로 소음이 반으로 줄었다. 여인의 영압이 구렁이처럼 현자들 목을 하나하나 틀어쥐는 것도 같다. 그중에는 그녀의 정부, 모로하시 타카히로 또한 있었다. 그는 제 연인의 등장에 괜히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 마저 진행합시다. 논점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았소.”

 

재판관이 책상을 두드려도 그러거나 말거나 저들 할 말을 하던 현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보기에는 형량이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하질 않습니까.

 

제법 재판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도 이전만큼 부산스럽지 않게 흐름이 이어져, 결국 시바사키 카즈오의 형량은 이 정도면 되겠소, 하고 재판관이 말을 건네던 때에 돌연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셨습니까?

 

재판관이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인은 법정 구석에 서 있다가 천천히 중앙을 향해 내려왔고, 그 발소리 사이사이에 현자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섞였다. 저 구렁이 같은 년이 또 뭘 들고 왔나보구먼.

 

감리관, 발언하시오.”

좀 진정이 되셨다면 말씀을 드리지요.”

 

여인은 저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의 가죽 끈을 풀어 말아 놓았던 것을 확 펼쳤다. 이제 그녀는 걸어와 카즈오를 마주보고 서 있다. 죄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인이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꽃향기. 토기가 쏠린다. 저 역겨운 꽃향기. 리호가 고개를 들어 현자들의 자리를 휘 둘러보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이것은 사백 년 전의 중하급 귀족 가문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중, 그 출신이 상인인 가문들의 기록을 가져왔지요.”

 

그러더니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는데, 그것에 카즈오는 손발이 벌벌 떨리며 입을 떡 벌렸다(여인이 사백 년간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가문에서 지원금을 받아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채였다.). 사백 년 전 상인에서 중급 귀족의 자리에 오른 시바사키 소우마가……

 

실종 처리 되었다가 최근 사망자 명단에 오른 8번대 10석 모리시타 히로토, 5번대 17석 츠치에 카오루, 5번대 16석 니시하라 유이토, 이외 10번대 일반 대원 열두 명을 납치하여 그가 운영하던 불법 투기장의 선수로 이용했음을 최근 밝혀내었습니다. 이들을 선수로 굴복시키기 위하여 사흘 밤낮을 잠을 재우지 않고 정신적인 고문을 일삼았으며, 그들에게서 참백도를 빼앗고 영압의 발생원인 백수와 영압의 증폭기인 쇄결을 구속하여 무려 서른여섯 번이 넘는 경기에 연속으로 참여하게 하였지요. 이러한 만행에 의해 그들 모두가 죽자 시체에 돌을 묶어 강물에 던져 은닉했으니, 이 죄에 대하여 이번 재판에서 함께 다루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여인은 말을 끝내고 햇살처럼 웃었다. 그녀가 검붉은 입술을 멈추자 그제야 중앙 이곳저곳에서 쑥덕대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재판관의 조용히 하라는 소리에 그들 모두가 단번에 침묵했다. 그것이 사실이오, 감리관?

 

이 시호인 리호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죄목이 생겨 오늘의 재판에서 판결이 나진 않을 것 같은데, 2심에서 이것에 대한 물증을 보여드리지요.”

 

여인의 당찬 말씨에 재판관 여섯이 머리를 맞대어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2심 재판은 사흘 후의 미시에 있을 것이라 말을 하며 법봉을 두드렸다. 세 번 울리는 그 소리를 카즈오는 듣지 못하고, 넋을 놓은 채 비참한 얼굴을 했다. 현자들이 모두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이 법정 구석에 서 있던 여인의 후계자가 리호에게로 다가왔고, 여인이 카즈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즈오. 일전 내게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은 이 정도면 되었느냐?”

 

여인의 말에 죄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떨었다. 그 끝에서 새어나온 것은,

 

어떤…… 물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게 묻지 않았더냐. 어찌 호정이 이런 썩어빠진 기관에 고개를 숙일 수 있느냐고 말이다.”

 

. 죄인은 고문을 받던 첫 날을 떠올렸다. 잔학하기 짝이 없고 멍청하며 제 이익만 챙기는 중앙에 화가 나 멋대로 그런 말을 내뱉었더라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는 않았으나, 조각조각 자신이 한 말이 떠오른다. …… 그랬었지요. 그렇군요…….

 

이곳은 아마 오랫동안 문치주의 사상을 내세우며 멍청한 논리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아마 기백 년이 지나도 그리할 것이야. 이곳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

 

여인은 여기에서 말소리를 줄였다. 뒤에서 죄인을 이송하려 다가오는 형군도 듣지 못한 듯하였다.

 

이 탐욕스런 늙은이들의 옆에는, 늘 내가 있지.”

 

말끝에 여인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카즈오는 절규하려다, 형군에 의해 입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묶인 의자 채로 수레에 얹혀 이송되는 꼴이 참으로 볼 만 하다. 그 찬 옥 바닥에서 다음 재판을 기다리는 나날이 어떤 색의 비참으로 물들어 버릴지 그는 알지 못했고, 그래서 겁이 났으며, 머리를 조이는 구렁이의 대사가 떠나지 않고 맴돌아 당장 죽기를 원했다. 여인은 재판장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다가, 후계자를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 가자꾸나, 아이야. 이제 저 놈의 사형 선고를 기다리면 되겠구나.

 

귀한 정보에는 적합한 때가 있단다. 늘 때를 기다릴 줄 알거라.”

 

여인은 언제나 라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라는 고개를 숙인 채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여인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그 자리와 명칭과 그 위엄과 그 모든 것. 시호인 리호가 앉은 자리에 군침이 돌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배 위로 올리고, 여인의 뒤를 따랐다. 밤의 뒤에는 언제나 해가 도사리고 있으니, 대계는 무한하여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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