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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인 리호

[단문] 송별

..,,,..,.,., 2016. 4. 21. 01:24

송별(送別)

 

w. 리네

 

1.

 

키리, 가마를 준비하여라. 역괴고산을 만나러 갈 것이야.”

, 리호님.”

 

7대 역괴고산의 은퇴식이 한 달 가량 남은 어느 봄날이었다. 야차군의 수장 천주는 그날따라 유독 머리 위에 화려한 장신구를 얹고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기라도 하듯 꼿꼿한 자세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시종 키리가 집무실에서 빠져나간 후에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리호가 보기에 오늘 날씨는 썩 나쁘지 않았다. 봄 햇살이 나른하고 꽃씨가 싹을 틔우는 흙 내음이 어디선가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만나 나눌 대화의 주제는 리호로서는 달갑지 않았으나, 그래도 따뜻한 봄 날씨가 마음에 들었다.

 

꽃이 피는구나.”

 

그녀뿐인 집무실에는 이미 봄 향기가 익숙히 배여 있었다. 시호인 리호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진하고 짙은 꽃향기, 영압보다도 강한 그녀의 체취. 혹자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고, 혹자는 참으로 역겹기 짝이 없다고 하는 그것이었다. 여인의 꽃향기는 그녀의 잃은 가족의 무게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져 그녀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 오랫동안 자욱을 남겼다. 리호는 잠시 창밖의 공기를 깊이 들이쉰 후, 고개를 돌려 수납장으로 향했다.

 

자개로 용 문양을 새겨 넣은 칠기 수납장은 그 높이가 여인의 가슴까지 와 수납장 치고는 제법 큰 쪽에 속했다. 위에서부터 세 번째의 서랍을 연 그녀는 무언가를 가지런히 싸 놓은 비단 보자기를 꺼냈다. 진한 철쭉 빛의 보자기는 보풀 하나 없이 부드럽고, 양 끝을 묶어 만든 매듭 또한 가지런하다.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묶인 매듭을 풀어 보자기를 열어젖히면 그 안에는 새까만 흑색의 하오리 한 벌이 있었다. 며칠 전, 7대 역괴고산의 은퇴 청원을 듣고 그녀가 호시지마 가문의 당주에게 부탁하여 지은 뒤, 키리가 수를 넣은 것이었다. 무명의 간수장 일을 오랫동안 하며 꽤나 헤졌을 하오리를 생각하니 없던 미안한 마음이 솟기도 했다. 그녀는 이따금씩 내비치는 자신의 인간적 면모가 꽤나 재미있어서, 혼자 후후 하고 웃음을 흘릴 때가 있었다.

 

보자기보다도 몇 배나 부드러운 비단 하오리는 햇빛에 비추면 반짝이기도 했다. 뒷목 부분에는 금실로 수를 넣은 역괴고산자수가 놓여 있다. 리호는 느린 손길로 한 번 옷을 쓰다듬다가, 접힌 선을 따라 도로 잘 개어 놓았다. 보자기 위에 올려놓고는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매듭을 지어 묶어 집무실의 책상 위에 놓고, 이번에는 가마를 준비하러 간 키리 대신 다른 여종을 불렀다.

 

오수유주 한 병을 내오너라. 꽃 장식을 한 좋은 주병에 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야.”

 

여종은 제대로 숙지한 것을 온몸으로 표현이라도 하듯 허리를 90도로 깍듯이 숙인 후 뒷걸음질해 집무실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또 다시 감리관 집무실에는 시호인 리호뿐이 남았다. 벽에 걸어놓은 큰 거울 앞에 서서 장신구에 흐트러진 곳이 있는지를 살핀 후, 여인은 흑색의 면의를 얼굴에 걸쳤다. 키리는 일 처리가 빠르니 곧 가마를 대령해 놓았다며 찾아올 것이다. 여인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2.

 

여인을 태운 가마가 정령정 골목을 몇 번이고 돌 동안 누구 하나 가마 안의 리호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었다. 교정관리관이 자취를 감추어 은밀히 행동하기 시작한지 200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대낮에 창도 열지 않은 호화스런 가마가 정령정 골목을 누비면 누구든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 가마의 화려함에 차마 수군대지도 못하고 가마가 멀어져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이나 작아진 후에야 옆의 사람을 툭 치며 저 가마 안에 누가 타 있느냐고 상대도 모를 질문을 하곤 했다. 가마가 흑육문에 가까워질수록 가마에 시선을 꽂는 사신의 수가 늘어만 갔다. 산호와 진주와 밀화를 엮어 올린 발의 흑색 휘장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용과 봉황이 기세 좋게 날아올랐고, 그 아래의 가마는 칠보로 장식되어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며 빛을 냈다. 크기도 제법 작고 화려한 장식도 없어 수수해 보이는 작은 가마 한 채가 그 뒤를 따랐는데, 안에는 여인의 청지기 키리가 앉아 있었다.

 

여인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제 청지기를 아꼈다. 세간에서는 참 신기한 노릇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첫 청지기인 차라에게 그러했으며, 그녀의 뒤를 이어 청지기 자리에 오른 키리에게도 여전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아도 먼 거리를 갈 때에는 좋은 가마에 태워 뒤를 따르게 했고, 수청방의 가구 또한 제법 값이 나가는 것들로 꾸려주었음을 여인의 가노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주인에게서 아낌을 받는 만큼 그녀의 청지기들은 항상 여인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의 충성을 다했으며, 또한 사랑받는 것이 드러나 시종임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태가 났다. 키리는 잘 차려입은 기모노의 무릎 위에 출발 전 주인에게서 전해 받은 철쭉색의 보자기를 올려놓고 있었다. 무릎의 왼편에는 생화 장식을 한 주병이 있어 그것을 왼손으로 잘 잡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제 주인을 모신 지 얼추 40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주인을 향한 충심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가마 안쪽에선 밖의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키리의 청각이 예민한 탓도 있었지만, 한두 명이 모여 수군대는 소리는 저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군중이 되곤 했다. 최근 들어 달이 뜬 밤에야 외출을 했던 그녀는 오래간만의 수군거림이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 벌써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수청방의 가구도 몇 번이나 바꾸어야 했고, 그녀가 단순한 여종으로 주인의 저택에 들어왔을 때 마당의 구석에 심었던 소나무는 이미 장정 열이 붙어도 뽑을 수 없을 만큼이나 거대하게 자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참 오래도 지났다.

 

3.

 

루콘가를 한참이나 걸은 후에야 여인을 태운 가마가 멈추었다. 가마 문이 열리면, 밖에 보이는 풍경은 나무로 우거진 숲의 동굴 앞이었다. 안쪽은 빛 한 점 없이 새까맣고, 당장이라도 호로 몇 마리가 기어올 것만 같은 음산한 기운을 풍긴다. 뒤에 내린 키리가 어느 새 보자기와 주병을 다소곳이 들고 리호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여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품속에서 작은 금제 종을 꺼내어 동굴 입구에 대고는 두어 번 흔들었다. 딸랑, 딸랑, 하는 맑은 소리가 동굴 속을 깊이 울리고, 잠시 뜸을 들이면 이내 동굴 따위는 언제 있었냐는 듯 여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철문이었다.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쪽에서 시뻘건 도깨비 가면을 쓴 여인이 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천주 어르신, 어인 일이십니까.”

 

한걸음에 달려왔음이 뻔히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리호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다.

 

오래간만에 만나 담소나 나누려 찾아왔으니, 긴장하지 말거라. 옥살이 중인 그리운 얼굴도 볼 겸 하여.”

염치 불구하고 서신 상으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무어 그리 말을 하느냐. 이런 빛 좋은 봄날에 어두운 곳에만 있으니 몸이 쑤실까 염려되는구나.”

천주 어르신의 말씀만으로도 봄을 댓 번은 맞이한 듯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도깨비 가면 너머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넘쳐흐르는 것을 키리조차도 알 수 있을 듯 했다. 키리 또한 현 역괴고산이 좋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괴고산은 빛바랜 검은 하오리를 펄럭이며 리호와 키리를 무명 안으로 들였다. 시꺼먼 어둠에 익숙한 세 여인은 차분히 감옥의 복도를 걸었다. 잔머리가 없도록 참빗으로 빗어 말총머리를 다부지게 묶은 역괴고산이 가장 뒤편에서 걸었고, 그 앞에는 고운 기모노 차림의 키리가 있었으며, 가장 앞서 가는 여인은 검은 면의를 덮어 쓴 천주 시호인 리호였다. 이따금씩 양 옆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무언가를 뱉어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신음이 들려왔다.

 

역괴고산, 내 그 자를 좀 만나고 싶은데.”

그 자라면 어느 놈을 말씀하시는지요?”

아즈마 신고라 하는 자이지.”

“492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지하 2층 왼편의 끝 방에 있습니다만, 대화를 하실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면 되는 것이니 긴장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그대, 많이 긴장을 하고 있어.”

 

천주의 말에 역괴고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것이, 한 달 밖엔 남지 않아 그렇습니다, 하고 실없이 웃긴 했으나 험악한 도깨비 가면에 가려 미소가 보이지는 않았다. 여인은 재촉을 하듯 빠른 발걸음으로 지하 2층으로 난 계단을 밟았다. 두텁게 울리는 발소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무명의 매력은 (매력이랄 것도 없어 보이지만, 시호인 리호는 폐쇄되었던 지하상가를 개조해 만든 이곳을 매우 아꼈다.) 무엇보다도 깊이 들어갈수록 더해지는 어둠과 습기였다. 오래 있는 것이 꺼려질 정도로 역하게 도는 피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음산하고 칙칙한 것이 이곳에 일주일만 살았다가는 몸뚱어리를 찢어서라도 죽고 싶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런 지하 감옥에서 최초의 여성 간수장으로 자리 잡고는 이전의 역괴고산보다도 더욱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내는 7대에 대한 리호의 마음은 꽤나 깊었다. 본래는 이번의 물러나겠다는 청을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다른 좋은 자를 생각해 두었다고 간곡한 마음을 서신에 적어 보내는 바람에 그것이 귀여워 그리 하여라, 하고 답장을 하고 만 것이었다. 천장에 그 흔한 등 하나 존재하지 않고, 컴컴하고 텁텁한 어둠과 습한 공기뿐인 이곳에서 리호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끝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기 썩는 냄새와 누군가 게워냈을 위액의 신 냄새, 짙은 피 냄새를 젖히고 꽃향기가 지하 2층을 메우기 시작했다. 여인은 마침내 아즈마 신고가 투옥되어 있는 옥 앞에 다다랐다.

 

, 위대하신 감리관이 오셨나보군.”

 

문득 옥의 철문 건너편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몇 갈래로 갈라진 사내의 목소리였다. 리호의 눈이 흥미로운 듯 커지다가 이내 반달 웃음을 짓는다.

 

여전히 정정하신가보아요, 아즈마 공.”

여전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역겨운 꽃 냄새 좀 어찌 할 수 없나?”

후후, 역겹다니요. 말씀도 험하셔라. 마련해드린 보금자리는 어떠십니까? 세 끼 식사는 충분하신가요?”

물밖엔 주는 것도 없는 자가 할 말인가? 돌아 눕기도 힘들지만 물이야 끝내주게 맛있더군.”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언제 바깥세상 구경 한 번 시켜 드려야 할 텐데 말이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잘도 하는군. 정말 변한 것이 없어.”

 

리호는 마치 반가운 옛 벗을 만난 듯 달콤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손을 뻗어 철문의 얼굴 높이에 있는 창문을 슬쩍 열었다. 감옥 안도 밖과 똑같은 어둠뿐이어서, 죄수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었다. 여인이 아쉬워하며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손끝에서 귀도의 빛이 돌아 옥의 안쪽을 비추었다. 가죽과 뼈만 남은 채 길어진 머리칼로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었으나 여인은 죄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 전에는 그녀와 뜻을 함께 하던, 한 때 리호에게 허리를 굽혔던 자였다. 제법 잘 사는 하급 귀족 집안의 맏아들인 그가 사신이 되어, 13번대의 20석에서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진급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루콘가 후방지구 전역에 마약이 유행하기 시작한 때였다. 호로 토벌을 갔다가 약 태운 연기를 마시고 취해 마약에 중독된 그는 결국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약을 손에 댔다는 혐의로 무명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아즈마 신고. 리호가 13번대 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 호정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결국 무명에 납치되어 온 후에야 리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이 어디냐 하고 처음 물었던 질문에, 리호는 방긋 웃으며 무명이라 합니다.” 하고 대답을 했었지. 가문에서는 이미 맏아들 신고가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기에, 신년이 되면 제사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이곳이 아니면 살아있을 곳이 없었다. 참 질기게도 살아 계시는군요.

 

리호의 말의 어디에서 재미를 찾았는지 아즈마는 통쾌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의 웃음이었으나 역괴고산은 무례하다느니 하는 말 하나 없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남은 것이 목숨밖에 없으니 어쩌나. 질기게 살아남아야지. 이 꿀맛 같은 물로 목이나 축이면서 말이야.”

제법 남자다운 얼굴이었는데, 아쉽습니다.”

꺼내주고나 그런 말을 해 보지 그러나?”

 

말을 하고는 아즈마가 또 낄낄 웃었다. 약간은 정신이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좁은 옥에서, 거의 200년이 넘도록 숨을 쉬며 살아야 한다면 미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그는, 낄낄 웃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본인이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호인 리호는 잘 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혀를 쯧, 하고 내차며 빛을 밝히려 사용했던 귀도를 풀었다.

 

여인이 붙잡고 있었던 작은 창문의 덮개를 도로 덮었다. 쇠창살이라곤 아침마다 넣어주는 물동이 크기만큼의 공간밖엔 없는 감옥은 쇠의 녹슨 냄새라거나 이따금씩 지독히 오염된 냄새도 나곤 했지만, 여인은 아즈마 신고와의 대화가 끝이 날 때까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길 바랍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아즈마의 답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돌아 계단으로 향하는 여인의 얼굴에 미소가 만면했다. 검은 면의를 어서 거두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4.

 

그래, 기분은 어떠하느냐?”

 

시호인 리호의 물음이었다. 역괴고산의 집무실은 깔끔하고 어두웠다. 아무렇게나 깎아 만든 도깨비 가면을 쓴 야차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와 촛불을 켜 탁자 중앙에 놓고는 슬그머니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여인과 역괴고산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이제 그 가면을 벗어도 되지 않겠어?”

그리하겠습니다.”

 

단정하고 굳건하다. 여인이 좋아하는 어조였다. 신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단단한 어조. 역괴고산이 투박한 손을 들어 도깨비 가면의 끈을 풀었다.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가면에 가려져 있던, 햇빛을 잘 보지 못해 창백해진 피부가 드러났다. 눈 아래로는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고, 짧게 친 앞머리가 가면에 눌려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제법 사랑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작은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가면을 벗은 채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는 그녀로서는 가면 없이 마주한 집무실의 풍경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칼로 찢듯이 귀를 뚫어 걸어놓은 흑색의 귀걸이는 시호인 리호의 선물이었다. 충심을 약속한 그녀에게의 답례. 오랜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란 것은 하오리뿐이 아니었다.

 

서운하진 않느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일을 하며 단 한 순간도 서운한 감정을 가져본 적 없습니다.”

향기 나는 말을 하는구나. 네게선 늘 좋은 향기가 나. 그래, 물러나는 저의는 단순히 그것뿐인 것이야?”

서편에 적어 두었듯이,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눈동자에 흔들림 하나 없다. 참 곧은 자이다. 제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고, 무명의 창립 이래 최상의 상태를 장장 68년 동안이나 유지해 온 여인이었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나 욕심이 깊지 않고, 아랫사람을 부릴 줄 아나 윗사람에게는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자. 리호는 그녀를 되도록 오랜 시간동안 역괴고산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호정과는 달리 원할 때에 퇴직해 물러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야차군의 일원인 그녀를, 자신의 욕심으로 잡아둘 수는 없다. 7대는 단 한 번도 맡은 바의 일에서 실수 같은 것을 한 적이 없었다. 무엇을 핑계 삼아 추가 복무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휴식이었고, 그렇다면 리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물러날 것을 바라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아쉽게 되었구나.”

죄송합니다.”

사과를 할 것까진 없다. 네가 참 좋은 자였기에,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었다. 내 욕심일 뿐이야.”

천주 어르신.”

그래.”

 

역괴고산은 뜸을 들였다. 흑색인지, 쥐색인지 모를 머리칼이 흔들리는 촛불에 따라 그림자를 만들었다. 촛불 너머로 마주하는 시호인 리호의 얼굴이란 무어라 적어내릴 수도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녀는 눈을 감고, 설핏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내뱉으니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존경해 마지않았고,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다. 역괴고산의 칭호를 물려받은 자로서 무명의 관리를 최우선으로 하며 살아온 시간이 길다면 길만한 시간이었다. 다른 이유라곤 없었고, 단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야차가 되기 전으로, 진앙 영술원에 발을 들이기 전으로, 루콘가 전역을 맨발로 걸어 다니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가족을 맺어 지내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었다.

 

리호가 빙긋 웃었다. 촛불 하나 켜 놓은 지하의 집무실에 태양이 뜬 것만 같았다. 흑색 머리칼을 화려하게 감아 비녀를 꽂아 넣은 머리가 여인의 미소에 따라 잠시 흔들렸다. 비녀에 달린 진주를 엮어 놓은 실이 움직이며 잘랑대는 소리를 냈다. 나무 빛깔의 염료를 얹어 놓은 눈가가 따뜻해 보인다.

 

역괴고산.”

, 어르신.”

내 선물을 좀 준비해 왔는데 받아 주겠느냐?”

 

받아 주겠냐며 말끝을 올려 질문을 하지만 역괴고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왕에게서 검을 받드는 기사 마냥 여인은 벌떡 일어나 제 주인의 앞에 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가만 보고 있던 리호가 어린아이처럼 마구 웃는다.

 

돌아가 앉거라. 여전하구나, 그대는.”

 

그러나 역괴고산은 여전히 우슬착지를 한 채였다. 이 자세가 아니면 받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의지라도 담겨있는 것 같았다. 리호는 후후, 하고 웃음을 내뱉다가 키리에게 손짓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철쭉 빛의 보자기를 들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내민 역괴고산에게 건넨다. 조심스레 받아들인 그녀는 보자기 안의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보다는, 모시는 자의 선물에 감격한 듯 보였다.

 

많이 헤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명에 들어온 이후 하오리를 선물한 적이 없지 않느냐. 적어도 마지막 날에는 그것을 걸쳐 주었음 해서.”

 

역괴고산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예쁜 얼굴이 아니지만, 보기 좋은 웃음이다. 입꼬리가 올라가면 양 볼의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이 제법 괜찮다. 질끈 묶은 머리칼이 고갯짓에 따라 상하로 흔들렸다. 이번에는 리호가 주병을 건네었다.

 

이건……,”

무엇이겠느냐. 술 한 잔 하자꾸나.”

 

5.

 

선임 역괴고산의 추천에 따라, 8대 역괴고산의 자리는 야차 92에게 위임하기로 결정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역괴고산조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제 곧 무명의 수장이 된다. 역괴고산이라 수를 놓은 하오리를 입고, 새로운 붉은 도깨비 가면을 쓴 채 무명을 장악한다.

 

무명의 죄수들에게는 별 다를 것이 없는 하루였다. 단지 평소보다 교도관의 입에서 역괴고산님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렸을 뿐이었다. 정신이 제대로 붙어 있는 몇 명의 죄수들은 감옥에 변화가 생기는구나 하고 대강 짐작만 할 뿐이었다. 돌아 누울 공간도 없는 좁은 옥 안에서 바깥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창문은 밖에서 걸쇠를 걸어 닫아 놓기 때문에, 교도관이 창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밖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루가 지났다.

 

지하 4층 왼쪽의 스무 번째 방에는 112의 번호를 가진 죄수가 있었다. 제 이름을 잊을 정도로 오래 이 곳에 있었던 자였다. 이름은 이미 기억나지 않았고, 그나마 가문의 성씨만큼은 길어진 손톱으로 살결을 뜯어 새겨 놓은 자문 덕에 기억하고 있었다. 코테츠. 그래, 코테츠라는 이름의 가문이었다. 동이 트기 전 담당 교도관이 나름 문이라고 말을 하는 철판 아래에 위치한 작은 창문을 열어 빈 물통을 거두어가고, 새로운 물을 넣어 줄 그 때 상대의 손의 움직임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미약한 빛으로 손등을 비추어 보았다. 여전히 코테츠의 자문이 새겨져 있는, 썩어 들어가고 있는 왼손의 손등. 썩고 있지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을 주는 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밖의 교도관 두 명의 (이제 곧 동이 트겠구먼.) 대화를 통해 그나마 괜찮은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이 감옥에 충분히 적응해 있었다. 바가지 하나 들어있지 않은 물 양동이에 손을 뻗어서,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신다. 갇힌 옥 안의 썩은 내가 지겨운 것도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알 수 없었다. 감옥의 벽에 무언가 표시를 하려 해도 돌 하나 없고, 그나마 있는 것이라곤 변소로 사용하는 구멍을 막아 놓은 판자뿐이었다.

 

오늘의 물은 맛이 달랐다. 평소에는 소금일지 간장일지 모를 것을 조금 넣어 놓은 맛이었지만, 오늘은 달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슨 일일까. 이 맛을, 아주 이따금씩 맛본 기억이 있었다. 살짝 머리가 어질한 것이 취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늘 같은 맛의 물만 먹는 그로서는, 새로운 것을 접하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탈옥할 수 없는 이곳에서, 밖으로 나간다고 한들 살 수 있을까? 그런 희망 따위는 웃기지도 않는다. 철판에 머리를 기대어 숨을 죽이면, 교도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역괴고산님은-

 

6.

 

그래. 역괴고산이 바뀌는군. 꽤나 오랜만의 일이다. 백 년은 지났을까? 어쩌면 조금 덜 되었을지도 모른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곳이었지만 오래 있으면 나름의 방법으로 날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여편네가 가고, 새로운 역괴고산이 무명을 차지하는 모양이었다. 물통을 교체하는 새벽에 잠들어 있었기에 이제야 알게 되었을지도 몰랐지만 물의 맛이 바뀐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달콤한 맛이 나는, 적당히 취할 만한 물이라면 술 밖에 더 있나. 비싸지 않은 약주를 나누어주는 물에 섞어 놓은 모양이었다. 이것이 무명의 나름의 축하의 방법이었다.

 

그럼 그녀가 왔겠군.

 

천주 말이다. 이 무명의 간수 놈들 모두가 따르는 자였다. 이들은 서로를 야차라 불렀고, 주어진 번호에 따라 구별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아주 지독하게들 충성하는 것이 분명했다. 천주님이라거나 천주 어르신이라거나, 혹은 존엄하신 천주라며 추켜세우는 꼴이 지겨울 정도였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또 그녀에게서는 독한 향기가 났다. 구역질이 날 만큼 진한 향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꽃향기일 것 같은. 멀리 복도 입구에서 근무 외의 교도관 전원이 집합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시작되느니, 뭐니, 하는.

 

7.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다. 떠나는 자의 마음은 가볍고, 그녀를 놓아 주어야 하는 내 마음은 무거운. 인재를 버릴 때의 마음은 늘 한결 같았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겨울은 다 간 것 같다. 철문 앞의 복도까지 제각각의 도깨비 가면을 쓴 야차들이 죄 일렬로 서 있고, 송별 의식을 앞둔 역괴고산은 한 달 전 받은 비단 하오리를 걸치고 있었다. 붉은 도깨비가면은 오른쪽 턱에 균열이 나 있었다. 여전히 높이 올린 말총머리가 당당한 걸음걸이에 따라 경쾌하게 흔들린다. 사월의 끝이다.

 

들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이 피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맑다. 철문 안쪽에서부터 걸어 나온 그녀가 내 앞에 멈춰 뒤를 돌면, 일렬종대 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야차들이 소리 없이 고개를 들어 같은 곳을 보았다. 시선의 끝은 나와 같이, 그녀에게 있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몇몇은 존경하는 그것이며, 몇몇은 깐깐한 상사에게서의 해방감을 맛보는 그것이었다. 격식과 예의는 있으나 시끄럽지 않은 송별 의식이 끝을 맺어가고, 마지막 의식을 진행한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에게로 다가가, 검을 뽑아 가면을 내리쳤다. 사월의 햇살이 깨진 가면 아래 드러난 창백한 피부에 눈부시게 떨어진다. 가면 조각이 후드득 지면 위로 떨어지고, 햇빛이 눈부셔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그녀가 일어나 나와 눈을 맞추었다. 평온한 얼굴이다. 그녀가 뒤로 돌아 깨진 것의 가장 큰 부분을 집어 하늘을 향해 번쩍 치솟아 올리자, 군중이 창백한 여인에게 허리를 굽힌다. 송별 의식이 끝났다. 하늘이 푸르고 녹음이 짙다. 뒤돌아 미소를 짓는 역괴고산- 아니, 타치바나 유우가 아리따워 보인다. 빼지 않은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내게 가면 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어, 검은 천에 감싼다. 일곱 번째 조각이다. 역괴고산의 집무실에 걸어놓을 일곱 번째 조각. 다음은 계승 의식의 시작이다. 8대 역괴고산의 칭호를 물려주는 의식. 피부가 붉은 사내가 일렬 속에서 걸어 나온다. 날씨가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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