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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娜誾)의 미소로 거두리

 

w. 리네

 

어느 국가에나 법이 두려워하는 공간은 존재한단다.”

 

여인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느릿하게 방 안을 울렸다. 간략한 가구를 빼면 남을 것이 없는 찬 방의 구석에 제대로 기우지도 못한 옷자락을 꽉 붙잡고 몸을 떠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바느질이 서툰지, 혹은 갑자기 들어온 여인의 향취에 마음이 놀랐는지 고사리 같은 손 군데군데 바늘에 찔린 자국이 보였다. 너도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구나.

 

예를 들자면, 내가 지나는 공간이라든가.”

 

시호인 리호가 발을 떼어 아이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는 힉, 하고 짧은 숨을 들이쉬다가 이내 몸이 굳었고 그제야 제 영압이 너무 거대하다는 것을 알아챈 여인은 숨을 골라 영압을 안정시켰다. 이제 되었느냐? 다정한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 모를 여인의 질문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끔뻑거리며 두 눈의 초점을 여인의 무릎 언저리에 맞추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는 사신이란다.”

 

아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 시호인 리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이의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아이가 앉은 방의 몇 곱절은 값이 나갈 흑색의 비단이 사박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여인의 손이 아이의 귓가로 향했고, 흠칫 놀라 더 빠질 공간도 없는 구석으로 아이가 몸을 잔뜩 밀착시켰지만 여인은 결국 아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많이 아파 보이는구나.”

 

여인은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손바닥 위로 금색 햇살이 솟아오르다 이내 아이의 두 손을 감쌌다.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이가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빛이 사라지고 여인이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였을 때에 아이는 바늘에 찔린 상처가 모두 나았음을 알아챘다. 누구십니까? 어울리지 않게 제법 정중한 말투로 아이가 첫 마디를 떼었다.

 

말을, 할 줄은 아는구나. 앞서 말했잖느냐. 나는 사신이란다.”

 

사신은 사패장을 입습니다.”

 

어느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잔잔한 어조였다. 여인의 표정에 일순 놀라움이 스치다가, 이내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어느 가문의 당주였더라, 첩에게서 낳은 아들을 빼돌려 루콘가 가장자리에 버려두고 갔다지. 네 출생이 어디인지 아느냐?”

 

본디 성도, 이름도 없습니다.”

 

여전히 떨리는 몸과는 달리 아이의 말투가 차분했다. 시호인 리호는 이 아이를 만난 것이 나름 행운처럼 여겨졌다. 아이를 데리고 자택으로 돌아가 가노로 일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노비로서 살아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격식 있는 어조로 천천히, 정확하게 말을 내뱉었다. 목소리 또한 어딘가 진중한 구석이 있었다. 강하게 태어난 싹이로구나.

 

허면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 주어도 되겠느냐?”

 

……저는 반란군의 노비입니다. 저를 죽이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그렇지. 그럴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어차피 이 일은 내 지휘 하에 있단다. 이 시호인 리호에게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아이의 두 손을 맞잡아 살결을 쓰다듬었다. 아이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잡혀 보아서,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이내 방 안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감리관, 반항한 자는 처형하고 투항한 자는 모두 포박했습니다. 사무적인 어조의 사내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허면 소리를 내지 않게 재갈을 물려 창고에 무릎 꿇려 놓아라.”

 

존명, 고개를 숙인 사내가 여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이는 멀뚱멀뚱 여인과 마당을 번갈아 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꽃향기가 납니다.”

 

진해서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보니 아이에게서는 꽤나 귀족의 향이 풍기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는 낡은 옷을 입어 노비 아이 하나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태생의 빛깔이 묻어 나왔다. 좋은 옷을 입히고 머리를 단정히 해 놓으면 꽤나 볼 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여인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허리를 펴 일어섰다. 아이가 따라서 일어나다 다리를 휘청거렸다.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나 보구나.”

 

밖에 나갈 수 없게 했습니다.”

 

내 그들에게 벌을 내리마. 그래, 미츠루가 어떻겠느냐?”

 

?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인을 살폈다. 이전과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하고 되묻자 여인은 네 이름말이다, 하고 답했다. ,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에도 여인은 개의치 않고 다른 물음을 던졌다. 사람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아이는 일순 과거를 떠올렸다. 머리채를 잡혀서 끌려 들어왔을 때, 그 때에는 아이 뿐 아니라 세 명의 소녀도 함께 있었다. 도망을 치려던 세 명의 소녀 모두 아이의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천천히 죽어 나갔지. 아이가 눈을 꾹 감았다가, 이내 떴다. 걸음을 옮겨 이미 방 밖으로 나와 버린 터라 햇빛이 보기 좋게 아이를 감싸 안았다.

 

세 번, 보았습니다.”

 

허면 오늘 한 번 더 보겠느냐.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것이야.”

 

여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아이에게 채 닿지 못했다. 아이의 시야에는 그저 여기저기 떨어진 피와 시체만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여인의 손을 꾹 잡아서, 여인이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픈 얼굴이구나. 네 가슴이 얼마나 울리고 있느냐? 저 시체 모두가 너에게 슬픔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더냐? 딱한 것…….

 

맨발의 아이는 여인을 따라 마당을 가로질러 창고의 문 앞에 섰다. 창고 안에 사람 기척이 있었다. 꽤나 많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창고의 문을 지키던 검은 옷의 사내 두 명이 창고 문을 열어젖히자 아이가 돌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말거라. 이제 모두 그저 짖지 못하는 개일 뿐이야. 시호인 리호의 말이 아이의 귓구멍을 타고 들어가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저기, 저기 맨 뒤에, 입가에, 찢어진 상처가 있는……, 저 자입니다. 더듬대며 아이는 손가락으로 사내 한 명을 가리켰고, 여인은 잠시 아이의 말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세 번 모두 저 놈이었나 보구나.

 

여인이 손짓하자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소녀 한 명이 성큼성큼 걸어가, 맨 뒷줄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다 놓았다. 이제 사내와 아이는 채 팔 하나 길이만큼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마주하고 있었으나 사내에게 아이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저 여인의 기모노 옷자락을 잡고 살려 달라 웅얼거리기에 바빴다. 으으, , 읍으으, 사내가 개처럼 낑낑대는 모습을 여인이 흥미로운 듯 내려다보다가, 이내 잡힌 옷자락을 빼내었다. 사내가 철퍽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으나 일전의 소녀가 다시 한 번 머리채를 잡아 무릎을 꿇렸다.

 

이 놈이 맞느냐?”

 

여인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방을 하지 않은 칼을 꺼내 들고는, 몇 번이나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소녀들의 작은 몸을 찢어 놓았던 악귀.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찢어진 흉터인지 입가에 길게 난 살인자의 자국은 한 달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그 곳에 있었고, 종종 아이의 꿈속에 등장하곤 했었다.

 

이 놈을 죽일 것이다. 네가 눈을 감지 않고 사내가 죽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다면, 내가 너를 거두마.”

 

여인은 제법 흥미로운 볼거리가 생겼다는 말투로 아이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사내의 옆에 서 손짓했다. 사내를 묶었던 밧줄이 끊어졌으나 그것도 모르는지 고통에 젖은 눈이 허공을 떠돌았다. 입고 있는 사패장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여인이 키리.” 하고 누군가를 부르자 창고 안으로 단정하게 차려 입은 소녀가 들어왔고, 이내 여인에게 공손히 검을 쥐어 주고는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시호인 리호가 검을 뽑았다.

 

아귀.”

 

뽑아 들은 칼날이 사내의 머리끝을 향해 있었다. 이윽고 사내의 주변에 회빛 안개가 깔리더니, 사내가-

 

찢어진 사패장 바지를 꽉 쥐고 몸을 떨던 반란군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분칠이라도 한 것 마냥 과장 없이 새하얀 얼굴이어서, 아이는 제 눈을 의심해야 했다. 사내가 두 손을 들어 목을 붙잡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 하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사내는 또 한 번 흙바닥에 쓰러져 발작처럼 몸을 위아래로 떨었다. 손끝이 독에 물든 듯 새파랗게 변하고, 크게 뜬 두 눈은 초점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사내가 목을 쥐었던 손을 들어 가슴팍을 쳐대려 했으나 손이 허공에서 놀았다. 어쩌다 얻어걸린 것은 한 번 뿐이었고, 이후로는 쭉 제 얼굴이 아니면 허공을 때려가며 몸을 떨었다. 일순, 허공을 휘적대던 사내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너무 빨리 죽었어.”

 

여인은 흥미를 잃은 얼굴을 하다가,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꽉 쥔 주먹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을 아끼지 못하는 아이로구나, 미츠루.”

 

아이는 저를 부르는 것도 모르고 시선을 사내의 떨리는 시체에 꽂았다. 까뒤집어진 눈은 흰자뿐이었고 손끝은 새파랗게 변해 여전히 덜컹대고 있었다.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기도 했다. 투항해 몸이 묶여 있던 반란군 모두가 창고의 구석으로 몸을 옮기기에 급했다. 여인이 다시 아이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만 나가자꾸나.”

 

여인의 목소리가 아이의 귓속을 파고들어 머리를 울렸다. 결국 주저앉아버린 아이는 창고 앞을 지키던 사내에 의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인과 아이가 나간 창고의 문이 닫히자 이내 뚝, 혹은 푹, 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

 

가노 중에 세키가하라 산고라는 여종이 있단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자이지. 자식을 갖는 것이 꿈이라 하였으니, 네게 그 성을 주마.”

 

돌아오는 길의 가마 안에서 아이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아이의 표정을 살피던 시호인 리호는 미츠루, 하는 아이의 새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다. 아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여인과 눈을 맞췄다.

 

너는 귀족 가문의 자손이란다.”

 

…….”

 

허나 이제 내가 거두어 널 가노로 일하게 할 생각이야. 괜찮겠느냐?”

 

.”

 

아이는 긴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인 듯 했다. 여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출생을 밝혀내어 가노로 잘 키운 후에, 언젠가 있을 거래에 유용한 패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차 몇 명에게 빠른 시일 내로 조사를 완료하라 이르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아이를 버린 가문을 찾을 수 잇을 것이고, 아이의 신변이야 시호인 리호의 저택의 가노인 이상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즈음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마침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하늘이 아직 이 시호인 리호를 떠밀어 주는구나. 달콤한 미소 속으로 사욕을 숨기며 여인은 자택에 새 가노를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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