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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첫 걸음?

..,,,..,.,., 2016. 6. 1. 20:34

 

[긴뮤지] 첫 걸음?

 

w. 리네 

 

1.

 

출근길 가로수 아래에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쨍한 보랏빛 꽃 하나가 손톱만큼이나 작아서,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며칠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작은 것들은 항상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 어느 날 기억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애도…….

 

오랜 백수 생활 끝에 취직하게 된 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올 초봄, 버스 정류장에서의 일이다. 그렇게 아침 일찍 버스를 타러 나가는 건 처음이었기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들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 의자에 앉아 혼자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제법 귀여운 여고생 한 명을 만났다. 그러니까, ‘그 애말이다.

 

그 애는 회빛 머리에 붉은 눈을 갖고 있었다. 연갈색의 머리칼은 제법 흔히 보이지만, 갈색이 섞이지 않은 회빛 머리는 아마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내 머리카락보다야 지극히 평범해 보였으니까. 이상했다 칠 것이 있었다면 그 애의 행동이었다.

 

책가방을 메고 단정한 흑세라 위에 연분홍 코트를 입은 그 애는 내 가슴팍까지도 오지 않을 만큼 작았는데,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누가 봐도 이상하게 여길 만큼 우뚝 서서는 놀란 표정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하니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보는데, 그 새빨간 눈동자 어딘가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 애 눈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감은 눈을 살풋 떴고, 그 애가 비명 같은 탄성을 지른 것은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

 

마치 동물원에 처음 온 어린애처럼 나에게 마구 다가오더니, 내 앞에 우뚝 서서 그 애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좀 웃긴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때 나는 그 애의 빨강 눈동자에 온몸이 젖어버린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웃긴 애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제법 귀여운 얼굴의 그 애는 올려 땋은 머리 꼭대기에 앙증맞은 리본을 묶고, 흑세라 카라에 핀 두 개를 꽂은 차림새였다. 가방끈을 꾹 쥔 두 손이 매우 작아서, 꾹 쥔 주먹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싶어졌다.

 

오야.”

 

그 애는 순식간에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동그란 두 눈을 반짝이며 계속 나를 살폈는데, 그 시선이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머리색 때문이라거나, 특이한 눈동자 때문에 자주 이목을 끌었으니까. 그 애가 입을 열었고,

 

이름이 뭐예요? 저는 미츠이시 뮤지!”

 

다짜고짜 통성명을 원하는 그 애에게 나도 이름을 알려주었다. 내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애는 내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했고, 뒤를 이어 나보고 엄청 잘생기셨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다간 제 코트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알사탕이었다.

 

선물이에요!”

 

처음 만난 동네 주민에게 통성명에 사탕 선물이라니 사교성이 참 밝은 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시작해 근 두 달이 지날 동안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는 꼭 그림처럼 그 애가 있었다. 오늘도 아마, 있을 것 같다. 이른 시간이라 정류장에는 늘 둘 뿐이었다. 그 시간이 조금 흥미로웠다.

 

그 애는 내가 매우 잘생겼다고 말했고, 자주 사탕을 꺼내 쥐어주었다. 가끔은 자기 친구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내게 질문을 했고, 또 가끔은 자기 학교 교복이 예쁘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제법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고, 석류꽃 같은 그 애의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그 애 말 끝에는 항상 느낌표 아니면 물음표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애는 나와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는데, 집에서 조금 멀기 때문에 늘 등교는 혼자 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느 날은 그 애가 먼저,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뮤지라고 불렀고, 그 애는 나를 긴 씨라고 불렀다. 이제 출근길 아침의 20분 남짓 되는 그 수다는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매일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그 애는 오지 않은 듯 보였다. 이제 날씨가 제법 따뜻해져 그 애는 얼마 전부터 겉옷 없이 교복만 입고 등교했는데, 그 모습도 꽤나 귀여웠다. 나는, 글쎄, 아마 그 애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 감정은 나쁘지 않다.

 

2.

 

이치마루 긴이 정류장에 도착한 지 3분 남짓 지났을 때, 멀리서부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츠이시 뮤지의 목소리였다. 긴 씨이이이, 하고 말꼬리를 쭉 늘이며 총총 달려오는 모습이 출근길 가로수 아래의 제비꽃처럼 보여서, 이치마루는 조금 새로움을 느꼈다. 소녀는 정류장 의자 앞에 서서는 이치마루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오는 길에 새로 개업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두 잔 사 왔다고 말하며, 옆에 앉는다.

 

별로 안 식었죠? 아침 출근이니까 힘내시라고 사 왔어요. 맛있어요!”

 

얼른 마셔 보라는 말처럼 들려 이치마루는 잔에 입을 댔다. 향긋한 커피 향이 아침의 봄 햇살처럼 마음에 들었다. 옆에서는 미츠이시가 커피 맛의 평가를 기대라도 하는 양 눈을 반짝이고 있다.

 

괜찮구마.”

그쵸? 앞으로 자주 이용하려구요.”

 

그 뒤는 늘 그렇듯 미츠이시의 수다로 이어졌다. 이치마루는 소녀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소녀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져왔다.

 

저 오늘 긴 씨 스토킹해도 돼요?”

 

이치마루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를 보며 미츠이시가 깔깔 웃었다. 괜찮아요? ? 하고 재차 물어오는 목소리가 박하사탕만큼 상쾌해서, 이치마루는 그냥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책임은 안 질낀디.”

 

학교 가겠다고 교복에 가방까지 메고 와서는 저를 스토킹 하겠다고 말하는 모양이 제법 웃겼다. 이 소녀는 자주 그를 웃게 했고, 그래서 일을 하던 도중 아침의 대화를 곱씹어보게 하기도 했다. 위험한데, 하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괜찮아요! 청춘이니까 땡땡이도 치구 그러는 거죠.”

 

미츠이시는 허락을 받아낸 것이 기쁘다며 박수를 쳐댔다. 소녀는 등교를 위해 타는 버스의 열린 앞문에 대고 그냥 가셔도 된다는 말을 했고, 이치마루가 출근을 위해 탑승하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이치마루가 맨 앞자리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자 미츠이시는 버스 안을 휘 둘러보다 제일 뒷자리로 뛰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토킹을 한다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싶어 이치마루는 머리를 긁적였다. 소녀 하나 빼고는 별다를 것이 없는 봄의 아침이었다.

 

3.

 

거절을 하면 어쩌나, 하고 몰래 긴장을 했었다. 그는 눈치가 빠르니까. 그의 입에서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이 나왔을 때, 입이 저절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가 늘 타고 가던 버스에 함께 오르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는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았고, 나는 제일 뒷자리에 가 앉았다. 버스 창문을 열면 달리는 차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스무 걸음 앞의 의자에 앉아 차창에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보는 그의 옆선이 황홀했다.

 

땡땡이를 치는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진학반이 아니니까 3학년이라고 하더라도, 반성문 한 장 쓰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 분명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학교에 가지 않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놀러 다녔었다. 친구들이 함께 할 때도 있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무단결석이나 한 번 해야겠다며 엄마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는 소녀처럼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좋아한다던 사람하곤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고 아직은 비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둘 다 소녀처럼 웃었다.

 

오늘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새로 생긴 카페에 기웃대다가 젊은 여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마음에 들었다며 커피 한 잔을 뽑아 주겠다는 그녀에게 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고, 제대로 돈을 지불했다.

 

제가 이 가게 첫 손님이에요!”

 

그러고는 커피 두 잔을 양손에 쥐고 그가 있을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혹 걷다 커피를 쏟을까 싶어서 뛰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정류장에 늦게 도착했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다. 오늘 날씨가 화창해서, 딱 땡땡이치기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교복 다림질에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다며 내 손을 꼭 잡고 날 응원했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그래도 아직은 봄 같았다. 정류장 가는 길에 제비꽃이 핀 것을 보았다고 그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자신도 오늘 제비꽃 핀 것을 봤다며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버스는 잘 모르는 거리를 마구 달렸다. 출근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고,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가게도 지나쳤다. 그와 나 사이의 중간 정도에 할머니 두 분이 호호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내 눈에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그만 보였다. 항상 생각하지만, 그는 정장이 참 어울린다.

 

반시간 정도 달리던 버스가 어느 코너를 돌았을 때, 그는 일어나 내릴 준비를 했다. 나도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매고 일어났다. 뒷문 앞에 그와 나란히 섰을 때, 나보단 한참 높이 위치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키득대고 웃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와본 적 없는 모르는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 바람이 너무 싱그러워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메시지가 왔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고는 도로 집어넣었는데, 그 손짓이 심장을 망치질 하듯 때렸다. 그가 걷는 자리에 레드카펫이라도 깔려 있는 것 같아서,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만 싶었다.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서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걸 보고 발을 동동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5분 정도를 걸었는데, 커다란 건물의 입구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그러고는 뒤를 돌았고, 나도 걷던 자리에 발을 붙였다. 이번엔 그가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가까워질수록 어디선가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회사 안까지 따라올 생각이믄 거절할낀디.”

긴 씨, 퇴근 시간 언제예요?”

호오,”

 

그는 마주선 나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머리 위에 턱 올렸다.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 경찰서에 잡혀가긋데이.”

설마요. 제가 뭘 했다구?”

아저씨 꼬시니 좋나.”

말 돌리지 말구요, 빨리. 퇴근 몇 시에 해요?”

 

4.

 

보고서를 작성하던 손가락이 우뚝 멈춰서는 키보드 위에 가만 올려 놓였다. 이치마루는 잠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다 남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한숨을 쉬었고, 다시 시선을 화면에 맞추었다. 뒤를 지나던 부장의 중얼거림이 또렷이 들려온다. , 뻔하지만, 머리색을 두고 흉을 보는 혼잣말이었다. 그에게는 나름 단짝 친구처럼 따라붙는 시선이어서, 누군가의 (어쩌면 다 들리라고 언성을 높였을지도 모르는) 혼잣말에는 이제 반응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물어오던 소녀는 답을 하지 않는 저를 두고는 다른 회사원을 붙잡아 물어보려 걸음을 옮겼다. 역시 당찬 아이였다. 급하게 소녀의 손목을 붙잡고 7시라고, 말을 내뱉긴 했는데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웃기기만 했다. 그녀는 마구 웃어대다가,

 

알겠어요. 7시죠? 저녁 같이 먹어요!”

 

뒤돌아 뛰는 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하던 소녀의 발걸음이 잊히지 않는다. 소녀가 뜀박질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땋은 머리가 눈앞에 선하다. 그는 잠시 일을 쉬기로 했다. 아침에 받아왔던 빈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그만두고는 그냥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미츠이시는 고작 17살이었다. 저와는 띠동갑이었는데, 실제 나이차 외에도 소녀의 어려보이는 얼굴이 죄책감에 한 몫을 했다. 네가 아무 것을 하지 않으면 뭐하나, 내가 문제인 것을. 이런 생각을 속으로 꾹꾹 눌러가며 자판기 앞에 서긴 하지만 별로 마시고 싶은 음료는 없다. 커피를 마신 덕에 아침의 졸음도 없었고, 결정타라면 역시 퇴근 시간을 물어보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직도 귀 옆에서 참새처럼 짹짹 울어대는 것 같다. 퇴근 몇 시에 해요?

 

이치마루의 이상형은 미츠이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인은 그렇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형의 조건이라면 얼굴이 예쁘다는 것 정도? 그의 이상형은 넘치는 원숙미에 큰 키와 섹시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는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여배우 여럿을 좋아하고 있었고, 실제로 서너 번 해 보았던 연애 모두 그의 이상형에 제법 비슷한 여성과의 교제였다. 그가 키가 작은 여자,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여자, 저와 띠동갑일 만큼이나 어린 여자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올 초봄까지는.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동창들과 만나 술을 한 잔 걸치며 이 이야기를 하면 도둑놈 아니냐며 얻어맞을 만한 관계가 아닌가. 이치마루는 소녀를 계속 좋아할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먼저 감정에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는 미츠이시 뮤지와의 관계를 동네 주민 여고생정도로 마무리 지으려 다짐했다. 그런데 오늘의 소녀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 위화감이, 관계의 진전을 뜻하는 것일 줄을 누가 알았을까. 이쯤 되면 그는 소녀의 심경이 궁금했다. 남의 속을 읽는 데에는 도가 튼 그였고, 미츠이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또한 뻔히 보이기는 했는데,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이제는 분간이 되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약간 닮았다. 그는 어느새 혼자 복도에 앉아 저녁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5.

 

꽤나 오랫동안 미츠이시는 사랑을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책상에 둘러앉아 첫사랑이라거나 누군가의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연애와 사랑은 참 재미있는 것이라고 고민도 않고 말을 던졌다. 첫 연애를 했던 중학생 시절, 연애 대상은 연상의 고등학생이었는데, 그가 원했기에 짜기 시작한 목도리를 끝마치기까지 소녀는 즐거움 외에 다른 감정을 느껴본 적 없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녀들은 설렘, 두근거림 등의 단어로 사랑을 표현했다. 미츠이시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겨우내 눈이 쌓였던 자리에 새순이 돋고, 소녀는 언제나처럼 혼자 등굣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첫눈에 반해버린 거야!’

 

다시 생각해보아도 머리끝까지 전율이 이는 것만 같다. 미츠이시는 그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책상에 둘러앉아 다른 때보다도 호들갑을 떨었다. , , , 있잖아,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첫눈에! 소녀는 말끝마다 느낌표를 열 개씩 붙이고는 흥분해서 말했다. 세상에! 후광이 반짝반짝 났단 말이야! 있잖아, 보자마자 심장을 내뱉을 뻔 했다구!

 

그날 그녀는 3교시 수업이 끝나도록 창문 너머로 하늘을 보며 눈을 연신 깜빡댔다. 열어놓지도 않은 창문 바깥에서 새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디서 나팔도 부는 것 같은데. 또 커다란 북소리도 들리고.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새로워 어색하다고 연신 웃어댔다. 그래도 소녀는 기뻤다. 정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스크린은 남녀 주인공의 진한 키스신을 끝으로 차츰 어두워졌다. 미츠이시는 괜히 큰 팝콘을 샀다고 투덜거렸지만,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상영관을 나와서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었고, 거울을 보다 문득 그녀가 다니는 고교의 흑세라가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1110분이었다.

 

점심 뭐 먹지?”

 

미츠이시는 이렇게 놀다가, 작은 선물 같은 것을 사 이치마루가 퇴근을 하는 시간에 회사 앞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선물은 뭘 살까, 반지는 너무 오버일 텐데, 사실은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선물 생각을 하느라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설레었고, 두근거렸고, 또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걸음을 한 번씩 옮길 때마다, 생각나는 대로 캐롤을 흥얼거린다.

 

시내를 걷던 소녀는 파스타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 번 와 본 적은 있지만, 맛이 기억나지는 않는 곳이었다. 가게 출입문을 보자 문득 새우크림파스타가 먹고 싶어졌고, 그래서 경쾌하게 문을 열어젖혔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6.

 

긴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해서 이치마루는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잔잔히 깔린 어둠 속에서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얼굴 가득 기쁨을 덧발라놓은 것만 같다. 오늘 중으로 처리해야 할 보고서가 세 개나 있어 내내 바쁘게 지냈는데도 출처 모를 곳에서부터 힘 비슷한 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치마루는 요것 봐라, 하고 속말을 던졌다.

 

저녁 안 드셨죠?”

이미 묵었제.”

거짓말~”

쪼꼬만 아가 눈치 윽수 빠르구마.”

 

미츠이시가 헤헤 하고 웃었고, 그 뒤를 이어 이치마루도 웃었다. 소녀는 그가 해가 져도 정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뭐 먹을래요? 하고 묻자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이미 메뉴는 정해놓은 것 같은데, 다른 쪽의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고민해요?”

우예 하믄 경찰서 안 잡히가는지 고민 중인기라.”

그냥 순수하게 밥 한 끼 먹는 건데도요?”

순수를 입에 올린 시점부터 틀려먹은 기다.”

 

이치마루는 소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회빛 머리가 간질간질하게,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다 제법 신경을 써서 정리해 주었다. 손길이 놀라웠는지 미츠이시는 눈을 동그랗게 떠 끔뻑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긴 씨!

 

엄청 두근두근해요!”

 

봄밤 바람이 차갑게 이치마루의 뺨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참,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하지만 저와 식사 한 끼 함께 하겠다고 이 저녁까지 기다린 소녀의 정성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정성에 대한 답례는 괜찮지 않을까? 이치마루는 언제나처럼 수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계산을 하는 사람이었다.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코트 해주실 거죠?”

원하신다믄야.”

 

소녀가 세라복 치마를 붙잡고 중세 서양 아가씨처럼 무릎을 구부려 인사하자, 이치마루는 과장된 몸짓으로 왼손은 등허리에, 오른손은 심장 위에 두고 허리를 숙였다. 둘이 얼굴을 마주보고 킥킥 웃다가, 이치마루가 먼저 길을 나서자 소녀는 그 옆에 붙어 동동 뛰는 걸음으로 그와 걸었다. 봄의 야경이 제법 아름다웠고, 미츠이시는 오늘 집에 가면 엄마의 손을 붙잡고 한바탕 수다를 떨 예정이었다. 소녀의 가방 속에서 잘 포장해 둔 선물 상자가 빛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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