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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뮤지] 파파라차

..,,,..,.,., 2016. 2. 20. 22:26

[긴뮤지] 파파라차

 

w. 리네

 

1.

 

상쾌한 민트의 가보시 힐을 신은 소녀의 발이 시체 밭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널찍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운 창고에는 생명이라고는 소녀밖에는 없어서, 모두 죽음, 죽음뿐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어보다, 발에 걸리는 시체의 늘어진 팔을 툭 차버린다. 이런. 몸뚱어리에서 떨어진 썩어가는 고깃덩어리가 멀리 날아간다.

 

제기랄, ……아니 이런, 여긴 없어요.”

 

깜찍한 얼굴로 욕을 내뱉다가 이내 꾹 삼키고는, 소녀가 창고의 문을 향해 소리쳤다.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화이트 슈트의 그, 이치마루 긴이었다. 소녀가 창고 깊숙한 곳에서 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시체 사이에서 잠긴 아타셰케이스를 발견하고는 뛰어간다. 바닥에 고인 피가 찰박거린 탓에 소녀의 맨다리에 마구 붙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는 가방을 주워들었다.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클러치에서 리볼버를 꺼내 잠금 장치를 향해 겨눈다. , 이나 탕, 혹은 팍, 비슷한 소리가 창고에 크게 울리고 소녀가 클러치에 리볼버를 집어넣는다. 이내 오렌지 빛깔의 가죽 장갑을 꺼내어 끼고는 케이스를 열자, 반짝이는 보석이 가득하다.

 

세상에! 파파라차!”

 

소녀가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이치마루가 어둠 속의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장님, 있잖아요, 파파라차에요! 반짝반짝! 아이마냥 까르륵 웃어대며 미츠이시가 케이스를 닫고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반쯤 열린 창고 문을 통해 빠져나와서, 달빛 아래에서 다시 열어젖히자 검은 아타셰케이스에 가득 담긴 보석이 달빛을 받아 환히 빛났다.

 

, 이거 가져도 되죠? 수고비라고 해 주세요. ?”

 

소녀가 눈을 빛내며 올려다보는 시선에 이치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뒤처리는 확실허게 해야 할 끼다. 물론이죠! 주먹을 꽉 쥐어 다짐까지 해 보이는 모습에 이치마루는 아타셰케이스를 받아들고 소녀가 어제 새로 뽑았다며 자랑을 해 대던 폭스바겐 페이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창고 문 앞에 놓아두었던 폭탄을 들어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더니, 나와서는 창고의 문을 잠그고 자물쇠가 열리지는 않는지 확인까지 해 보았다. 정확히 잠긴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소녀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좋았어!”

 

미츠이시는 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털썩 앉았다. 이제 이 차가 항구를 빠져나가고, 소녀가 클러치에서 폭탄 스위치를 꺼내 누르고 나면 시체 위에 놓아 둔 폭탄이 폭발하고- 썩은 고깃덩이에 불이 옮겨 붙어 화염지옥이 되겠지.

 

뮤지, 살아있는 아 없는 기, 확실한 기제?”

물론이죠. 제가 숨 쉬는 걸 모를 리 없잖아요?”

 

아예 태연하게 윙크까지 해 보인다. 시동 걸린 페이톤의 전조등 불빛이 환하게 창고를 비추다 항구에서 사라졌다. 항구의 빈 창고에서 멀리 떨어진 다리를 지나며 소녀가 클러치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폭탄 스위치를 잡아 꺼냈다. , 누르는 동시에-

 

2016325일 오후 101733. 니가타 현의 항구에서 굉음과 함께 시뻘건 화염이 솟아올랐다.

 

2.

 

뉴스는 니가타 현의 폭탄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이치마루와 미츠이시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있었다. 와인 잔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닌 요구르트였고, 둘 다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대며 짠, 하고 건배를 연발했다.

 

시체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대요.”

, 까마귀 깃털 떨어진 자리니께 당연한 결과지라.” 

그럼요.”

 

소녀의 귀에 세공된 파파라차를 하트 모양으로 장식한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미츠이시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붉은 색과 비취 빛깔의 보석을 제일로 쳤다. 루비, 레드 사파이어, 가넷, 아쿠아마린, 블루 토파즈……, 그리고 파파라차. 진한 피의 색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그냥, 예쁘잖아? 하는 심산으로 소녀가 좋아하는 보석이었다. 대부업 계의 대기업, 화이트론의 비서실장. 미츠이시 뮤지의 직책이었으나 그녀의 차림새는 점잖지 않았다. 크롭탑에 미니스커트, 그리고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나 강한 색감의 백 등……. 그나마 비서실장의 자리에 어울리는 것이 있다면 정장의 재킷이었지만, 그마저도 어깨에 걸치고만 다니는 탓에 사원들의 눈초리가 제법 따가웠다. 부사장의 비서 루카 아쿠아마린은 직접 옷차림 지적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따금씩 한숨을 쉬곤 했다.

 

뭐 어쩔거래? 그래도 저, 일 잘 하잖아요?”

 

뾰로통해져 입을 쭉 내밀었다가, 소녀가 이치마루를 향해 물었다. 또 앞뒤 다 짤라 먹고 말을 하는구마, 뮤지. 미츠이시가 들고 있는 와인 잔에 건배를 하면서, 이치마루가 머꼬, 하고 물었다.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자꾸 수군거리더라구요.”

, 그런 기 신경 쓰이는 아였나.”

헤헤, 신경 같은 거 쓰지 않기는 해요. 괜히 투정 부리는 건데, 안 받아줄 거예요?”

 

소녀가 눈동자를 빛낸다. 킬킬 웃어가며 이치마루가 대뜸 콧등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으아앗! 과장되게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며 소녀가 탄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인다.

 

새하얀 실크 원피스가 소녀의 마른 몸을 따라 직선으로 떨어졌다. 뮤지, 절벽은 여전하구마. 이치마루가 소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쿡쿡 찌르는 탓에 소녀가 간드러지게 웃다가, 절벽 하는 말을 듣고는 몸을 홱 돌려 소파의 끝에 가 자리 잡는다. 정말,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입술을 쭉 내민 모습이 오리처럼 보여서 이치마루가 팔을 뻗어 소녀의 삐죽 내민 입술을 잡았다.

 

머꼬, 뮤지. 오늘은 안 땡기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내는 땡기는디-”

저두 그렇거든요?”

 

그라믄? 머꼬? 다시 물어오는 이치마루를 향해 미츠이시가 억지로 삐진 표정을 짓다가,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걸고는 턱을 괸다.

 

찾아야 할 아가를 못 찾았잖아요.”

타카하시 쿠즈 말하는 기라?”

으응.”

 

미츠이시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테이블에 놓았던 잔을 들어 요구르트를 홀짝였다. 보스에게서 직접 받은 첫 명령이니 나름 중요한 일인데, 이 사내가 쥐새끼마냥 발이 빠르다더니 허황된 소문은 아닌 듯 했다. , 저도 꽤 빠르다구요. 툴툴대며 소녀는 사내의 용모파기를 읊었다.

 

174, 몸무게 79, 짧은 스포츠머리에 뒷목의 큰 점, 왼손의 손등에 칼에 찢긴 자국, 찢어진 눈에 낮은 코, 입술 아래에 점 두 개. 닮은 사람이야 잔뜩 발견했지만, 그 중에 그는 없었네요. 타카하시의 번호로 전화가 왔길래, 만날 장소로 향했더니 밀거래 하는 놈들이랑, 죄 여자 하나 따먹어보려는 족속들이었구.”

 

핸드폰은 확인해 봤나?”

. 절 불러낸 아가들이 제 얼굴을 알고 있더라구요. 전에 말했었나요? 타카하시 애인이 우리 조직원이에요. 그 아가가 타카하시의 핸드폰으로 제 얼굴 사진을 보냈나 봐요. 제가 쫓는다는 걸 알고서. 타카하시는 도주 중에 소매치기를 당한 거구, 절 불러낸 아가들이 그 소매치기 놈들이구요. 멍청하게도, 자리를 어쩜 그렇게 잡는담?”

아아? 쫓는다카는 메시지는 없었나?”

급했나 봐요, 사진만 달랑 보내놨어요. 지금 고문실에 가둬 놓은 채라, 아가 핸드폰을 제가 갖고 있었거든요. 연락이 왔길래 나간 건데 웬걸.”

그기에 덤으로 도둑맞았다 카던 보석 밀거래 현장꺼정 잡았제.”

 

하하, 이치마루가 웃음을 흘렸다. 소녀가 손을 들어 귀걸이를 빼내더니,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테이블 위에서 파파라차가 반짝, 빛을 낸다. 미츠이시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볼을 긁다가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뉴스는 끝나고 화장품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잘 나가는 아이돌 가수가 민낯이라고 거짓말을 치는 새하얀 피부 위에 로션을 펴 발랐다. , 쟤 잘생겼네요. 그쵸?

 

이치마루는 답이 없었다.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는데, 미츠이시가 그에게서 멀어져 있었기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척을 하며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래요. 전에 사다 둔, 골든 원더 아직 있죠?”

 

미츠이시는 러쉬의 배쓰 밤을 좋아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한정판으로 나온 골든 원더를 제 집에 열 개, 이치마루의 집에 다섯 개 가져다 놓고는 가끔씩 그의 집에서 자고 갈 때에 어김없이 사용하곤 했다. 별가루가 뿌려져 우주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라나, 뭐라나. 이치마루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소녀의 감성이었지만, 나름 그런 것이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다. 소녀가 총총 욕실로 걸어갔고, 이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치마루는 소파에 혼자 누워 리모컨을 꾹꾹 눌러댔다.

 

3.

 

뮤지.”

 

원피스 한 장을 걸치고 침대에 누워 게임을 하고 있는 소녀에게로 이치마루의 손이 뱀처럼 기어 들어왔다. 기분 좀 나아졌제?

 

으음~ 그런 것 같아요.”

 

소녀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혼자 달리던 스포츠카가 커브를 꺾지 못해 쾅, 부딪혔고 이내 화면에 게임 오버, 가 뜨지만 이치마루도 미츠이시도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치마루가 통이 넓은 소녀의 원피스를 단번에 벗겨냈다.

 

소녀는 언제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지만, 잠자리를 가질 때에는 수동적이었다.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리드할 수 있도록 가만히 있기만 했다. 나름 이런 부분도 소녀의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그였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조금 매니악한 취향을 드러낼라 싶으면 필사적으로 막아대니 저도 절제를 해야 했다. 소녀의 몸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없었다. 매끈한 살결에 근육 하나 붙어있지 않아서, 누가 보면 싸움이라고는 한 적도 없이 자란 소공녀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하여간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아이라며, 킬킬 웃어댄 이치마루가 미츠이시에게 입을 맞춘다.

 

이치마루는 아무리 생각해도 백사라는 호칭에 딱 들어맞는 사내였다. 입술도, 손끝도 차가워서 닿으면 움찔거리게 되었고, 어쩌면 독이 퍼져 몸이 마비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가 제 옷을 벗기고, 몸을 더듬을 때에는 큰 입을 벌려 통째로 삼켜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분 나쁘거나 무섭다는 감정으로 와 닿지는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그녀만이 그렇게 느낄지도 몰랐으나 그 덕에 소녀는 이치마루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치마루는 항상 다정하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선을 지켰다. 이따금씩 저를 삼키려는 냉기가 너무 강해질 때에는 그녀가 저지했기 때문일까. 사내가 제게 입을 맞추면 미츠이시는 차가운 입술을 맞대어 녹여주려 하곤 했다.

 

미츠이시의 다리를 타고 올라온 차가운 손이 가슴께를 향해 기어 다녔다. 피아노 연주라도 하듯이 쿡쿡 눌러 대서, 간지럽다며 웃다가도 곧 간지러움이 쾌락으로 변했다. 킹사이즈의 침대에서는 삐걱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지만, 대신 하얀 사내의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침대 위를 메꿨다. 그렇게 웃겨요? 귀여워서 그러제. 아무렇게나 빈 말을 던지는 것을 알면서도, 미츠이시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 , 볼이며 콧잔등에 차가운 입술이 닿는다. 미츠이시도 쿡쿡 웃었다. 소유하는 법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이치마루는 확 끌어당기다가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놓아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삼키고 싶은 것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삼킨다. 소녀는 아직도 그가 저를 삼킬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에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딱히 확신이 필요한 관계도 아니었지만.

 

,”

 

소녀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사내가 미츠이시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이내 그 자리에 키스를 하고, 붉은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다시 입술을 덮친다. 몇 번이고 키스와 함께 가슴이며 허리를 더듬다가, 이내 몸을 일으키더니 이치마루가 양 손으로 소녀의 다리를 잡는다. 침대 옆 스탠드의 불조차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4.

 

아파…….”

 

소녀가 허리를 콩콩 두들겼다. 전날 밤의 흔적이 여전 남아 있었다. 이치마루는 새삼 뭘 그러냐 하는 표정으로 발을 끌어 걸어와서는 샐러리 주스를 내밀었다. , 싫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내미는 컵을 받아들고, 미츠이시가 얼굴을 구겼다. 여전하구마. 킬킬대면서 웃음을 흘리는 이치마루가 괘씸하다가도, ‘사장님이 날 위해 주스를 만들어 주셨어!’ 하고 생각을 하니 또 잔뜩 기뻐지는 바람에 소녀가 눈을 꼭 감고 주스를 단번에 들이켰다. 매콤하고 쌉싸름하기만 한 주스가 인후를 타고 내려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준다. 으에에- 소녀가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얼얼하다.

 

팬케이크 먹고 싶어요…….”

베이컨도 곁들여서.”

맞아요! 직접 하긴 귀찮은데……, 믹스 있어요?”

아마도.”

 

소녀가 엇차, 하고 다리에 힘을 주더니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어쩌면 제 집보다도 더 익숙할지도 몰랐다. 찬장을 열어 믹스가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이번엔 냉동고를 열어 베이컨을 찾아 꺼낸다. 이치마루가 부엌으로 향했을 땐 이미 앞치마까지 두르고, 프라이팬 하나에 기름을 두르는 중이었다. 주스는? 토마토. , 좋제.

 

이치마루가 접시와 나이프, 포크를 찾아 꺼냈다. 그동안 베이컨이 자글자글 소리를 내며 노릇하게 구워지고, 소녀가 빠른 손놀림으로 키친 타올을 꺼내 베이컨을 올렸다. 옆의 프라이팬에서는 반죽이 약한 불에 구워지고 있었다. 아침을 자주 핫케이크로 해 먹다 보니 소녀의 실력에 빈틈이 없었다. 짜잔, ! 하더니 사이에 베이컨을 깔고 메이플 시럽을 뿌린 핫케이크를 곧장 이치마루의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냉장고에서 토마토 주스를 따라 건네고 소녀가 이번에는 제 것을 굽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이치마루를 봐 왔기에 소녀는 누구보다도 그를 가장 잘 알았다. 굳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치마루는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뱀의 호칭에 어울리는 자였으며, 생각도 마음도 껌 씹듯 쉽게 숨길 줄 아는 자였다. 소녀와는 조금 다른 편이었으나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 침대에 누워 손깍지를 끼면 열이라곤 없는 차가운 손에서부터 저릿하게 전해져오는 냉기에 이제 익숙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까? 내게 익숙해져 있을까.

 

소녀는 이치마루의 집에 그녀의 흔적을 잔뜩 남겨두었다. 혹시 떨어지게 되더라도, 이치마루의 집안 곳곳에 제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언제든 목숨을 위협받을 것을 대비해야 하는 직장을 가졌기에 더욱 그랬다. 깔끔하게 헤어진다면 모를까, 어쩌다 총알이 가슴께를 뚫고 지나가거나, 이마라든가 코끝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지 못한다든가- 여러 가지 상황으로 제가 죽게 된다면, 그가 적어도 1년 정도는 소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온갖 생각으로 복잡해지다가도, 구워진 핫케이크를 보면 침이 돌며 이내 즐거워지는 그녀였다.

 

, 좋은 냄새!”

 

소녀가 이치마루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때요, 맛있어요? 하고 물어오는 미츠이시에게 이치마루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통 이상의 솜씨다. 전업이 킬러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요리 쪽으로 나가도 되었을 텐데 말이제. 이치마루는 자주 이 말을 삼켰다.

 

오늘은 영화 봐요. 중국 무협 영화로.”

점심 먹고는?”

당연히 타카하시를 찾으러 나가야죠. 그쵸?”

오전에 나가도 좋지 않긋나.”

으음?”

 

소녀가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통통 두들겼다. 킬킬, 그렇다믄 어쩔 수 읎제. 마지막 핫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는 이치마루가 토마토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들었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사서 들고 온 주스였다. 생과일을 사서 갈아 드리겠다는 소녀의 말을 무시하고 귀찮다며 대충 그 중 가장 비싸 보이는 것을 들어 계산을 했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빨간 색이 피처럼 보였으나, 역겹지 않다. 늘 보고 지내 온 색이었으니. 오히려 정겹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침대 가에서 소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멜로디였다. 소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나더니, 침대로 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세상에, 안녕? 오랜만이네? 깔깔대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치마루의 시선도 함께 이동했다. 소녀가 다시 식탁 앞에 앉아 핫케이크를 찍어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사이에 통화 상대와 대화를 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충 고등학교 동창생 정도 되지 않을까. 미안해, 요즘 좀 바빠서. 으응. 그래, , 잘 지내야 해! 나중에 만나자?

 

미츠이시는 졸업 후 한 번도 동창회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창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동창회는 가기 귀찮다고 말을 했었다. 별로 거짓말로 느껴지지도 않는데다가 동창회가 있던 날에는 또 일이 생기곤 했으니 그도 굳이 가지 않는 이유를 캐 묻진 않았다. 소녀가 쫑알대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2학년 때에 같은 반이었던, 짧은 금발이 예쁜 아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이치마루가 감은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히나기쿠라 하던 아제?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만난 지 1년이 넘어서요, 한 번 얼굴 좀 보자구 하더라구요.”

……타카하시 그노마 찾고 나믄 시간 널널할끼다.”

거짓말~ 이래봬도 저, 화이트론 비서실장이잖아요? 바쁘다는 거 알구 있어요. 어쩌다가 비서실장까지 된 건지 몰라!”

 사장 비서니께 그러제.”

 

소녀는 이미 핫케이크를 모두 먹고, 토마토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고 있었다. 이치마루가 먼저 일어나 그릇을 개수대에 넣었고 그 뒤를 소녀가 따랐다. 아아, 귀찮아. 설거지 나중에 해도 되죠? 알아서 하그라. 부엌의 불을 끄고, 미츠이시가 소파를 향해 달렸다. TV에서는 여전히 어젯밤의 폭발 사고를 보도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거 봐요. 공개 수배 중이던 아가도 있었대요. 내가 죽여 버렸네?

 

뉴스는 대충 넘겨버리고, 미츠이시가 TV 아래의 서랍을 열어, DVD를 살폈다. 오늘은 이거 볼래요!

 

5,

 

아아, ,”

 

타카하시 쿠즈. 5년 동안이나 칸나의 눈을 피해 전국으로 도망을 다닌 악질의 고객님은 지금 제 머리를 노리고 있는 리볼버의 총구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앞에 버티고 선 미츠이시는 한 손으로 대충 사냥감을 겨냥하고 왼손으로는 여유 있게 목운동을 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이치마루가 주저앉은 타카하시를 향해 걸어왔다. 이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친다.

 

읽어보세예.”

 

타카하시는 고장 난 인형처럼 몇 번이고 살려달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뛰어 도망치느라 흘렸던 땀이 셔츠에서 말라붙어 하얗게 소금이 되어 있었다. 미츠이시가 총구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다 대자, 흠칫 놀라 몸이 반쯤 튕겨져 오르다가 이내 계약서로 시선을 옮긴다. 더듬더듬 읽어 나가기 시작했으나, 정확히 들리지 않자 이치마루는 다시, 하는 말을 내뱉었다.

 

제대로 읽어야지예.”

, ……!”

 

이제 명줄이 끊어지게 생겼으니 그에게도 자존심은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입을 열어 전보다는 조금 정확하고 바른 목소리로, 또박또박 계약서의 내용을 읽는다. 제 주소와 이름, 그리고 연락처와 대출 금액을 지나쳐 계약서의 조항 1 부분을 읽어야 할 때에 타카하시의 말이 뚝 멎었다. 겁이 났나보네요. 미츠이시의 말에 이치마루가 씩 웃었다. , 그라니께 5년 동안이나 도망만 쳤긋제.

 

죄송합니다……, , 살려, 살려주세요,”

 

이제 듣기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미츠이시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꿇어앉은 사내의 무릎에 던져 꽂았다. 아악, 으아악, 하고 커다란 비명을 내질렀으나 이곳은 경찰도 들어오지 않는 무법지이다.

 

무릎에 칼 하나 꽂혔다고 몸값이 떨어지진 않겠죠?”

당연하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킬킬대면서도, 미츠이시의 총구는 여전히 타카하시의 이마를 노리고 있었다. 손을 결박해 놓은 밧줄이 끊어지기라도 할 만큼이나 타카하시가 괴성을 지르며 중심을 잃어 쓰러졌다. 미츠이시의 손도 쓰러진 그의 머리를 향해 이동했다. 이치마루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혈연관계도 없으시고, 교우관계도 형편이 없으시고, 마 옆집 아가씨까제 꼭 좀 잡아 달라고 사정을 해 싸더마. 고객님, 여적 안 죽으신 기 용하시네. 이웃님들헌테도 돈을 윽수로 빌리셨어예, 으응.”

 

이치마루가 머리를 긁으며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지는 않고, 잘근잘근 씹어가며 여태껏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타카하시를 보고 소녀에게 눈짓을 하자, 소녀가 타카하시의 셔츠 칼라를 붙잡아 다시 무릎을 꿇렸다. 아아, 땀 봐, 더러워! , 진짜! 성질이 났는지 소녀가 타카하시의 너머로 총을 한 번 발포했다. 이제 타카하시는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얼굴이 범벅이 되어 있어서, 아무리 다시 쓰러져도 얼굴만큼은 손대고 싶지 않을 정도라며 미츠이시가 넉살 좋게 말을 던졌다. 이치마루는 계약서 종이를 다시 타카하시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보이시지예? 고객님이 돈을 안 갚으셔서, 이자가 윽수로 불어났지라. 장기 다 끄낸다고 갚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지만예, 봐드려야제 어쩌겠능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타카하시는 아예 말을 하는 법을 잊은 듯 했다. 이치마루가 주변의 의자를 끌고 오느라 천장이 낮은 지하실에 매달려 있던 전등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의자를 끌어와 앉은 그가 슬쩍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우산을 옆에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고객님. 우리는,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님께 기회를 드리는 거라예. 회사 소개에도 떡-하니 쓰여있는디 못보셨능교? 신뢰를 잃은 고객님헌티 드린 기회는 거둬 가야 정상이지라.”

 

사쿠라, 이치마루가 이름을 부르자 닫혀있던 지하실의 문을 열고 벚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들어왔다. 얼룩진 피가 빠지지 않아서 군데군데 연갈색의 핏자국이 있는 의사가운의 가슴께에 사쿠라 키리카, 하는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미츠이시가 들어온 여자를 향해 웃어보였다.

 

우리 고객님, 옥체는 강녕하셔야 할 텐데 말이지라. 의사님, 검사 싹- 해보시고, 가능하믄 다 빼가꼬 보고하세예.”

 

알았어, 하고 대답하며 사쿠라가 묶여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인데다,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짜며 살려달라고 발악을 하는 모습이 추해 보였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사내의 동공이 풀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껍데기만 남겠네, 아가.”

 

소녀가 타카하시의 이마에 겨눴던 총구를 거두고, 리볼버를 옆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사쿠라의 뒤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 두 명이 와서는 타카하시를 끌고 사라지고, 타카하시의 살려주세요, 인지 살려줘, 인지 혹은 욕일지도 모를 비명은 복도를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쿠라가 대충 고개를 숙이는 체 하며 방을 빠져 나갔고, 이치마루와 미츠이시만이 남았다.

 

드디어 끝났네요.”

수고했다, 뮤지. 잡아오느라.”

뭘요! 맞닥뜨리는 게 어려웠을 뿐, 얼굴 확인하고 나서 잡아오는 건 쉬웠는걸요.”

 

소녀가 깔깔 웃었다. 여전히 동자승마냥 맑은 미소다. 앞에 거울을 들이밀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여자가 누구지? 하고 질문을 던지면 곧바로 미츠이시 뮤지, 하고 이름이 튀어나와도 그리 놀랍지 않을 만큼이나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이치마루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소녀는 통통, 발을 구르다가 사장님, 아이스크림 끌리지 않아요? 하고 질문을 해 왔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나?”

! 초코 앤 크림!”

 

소녀가 눈 속에 별이라도 뿌린 듯 깜빡이며 귀여운 표정으로 이치마루를 쳐다보자, 예의 킬킬대는 웃음과 함께 이치마루는 미츠이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 그라믄 먹여 드려야제, 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잘생겨 보였는지, 미츠이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사장님, 엄청 잘생기셨네요! 완전 내 타입!”

이제 알았나?”

아뇨! 매일 알고야 있죠!”

 

6.

 

봄이다. 지금은 개나리가 만개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벚꽃이 피어서, 거리에 하야거나 약간 분홍빛을 띤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을 볼 수 있겠지. 미츠이시는 벚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봄의 묘미가 벚꽃 떨어지는 거리를 걷는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했다. 진흙탕, 혹은 피바다에 비유하는 이 전쟁터에서마저 소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보통의 커플이 하는 여러 데이트를 즐겼다. 데이트 도중에 총알이 날아온 적도 있었고,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소녀의 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아까운 차를 버리고 이치마루와 함께 냅다 줄행랑을 쳐야 하기도 했으나 그 무엇도 소녀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소녀는 그럴 때에는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 내 상대의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을 박아 넣거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하여간 고집은 꺾을 수가 없다며 이치마루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죽어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시체에다 대고, 데이트를 망쳐 버렸다며 책임지라고 툴툴대는 것이 소녀였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살아남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츠이시는, 살인을 하는 데에 죄책감은 갖고 있어도 망설임은 없었다. 또 사람을 죽였어요, 하면서 불단에 향을 꽂아 기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에는 으레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참회합니다, 하고 말을 했으니 어느 쪽의 모습이 소녀의 본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오직 이치마루 긴만이 그녀를 완벽히 이해하는 듯 했다.

 

소녀는 그냥, 그냥 미츠이시 뮤지일 뿐이었다. 그녀는 미츠이시 뮤지이고, 뛰어난 실력의 킬러 적오이며, 화이트론의 비서실장이자, 이치마루의 비서였다. 가끔씩은 부모님께 착하디착한 외동딸이 되어 보이기도 했고, 더 가끔씩은 이치마루의 연인이 될 때도 있었다. 서로 사귀느니, 결혼을 하자느니 하는 말이 없어 그랬다. 그의 애인이 저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서였을까, 소녀는 이치마루에게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확인하려 드는 성격은 아니니까. 소녀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타이트하게 허리선을 강조하다가, 골반 부분부터 퍼지기 시작해 핏이 예쁘게 떨어지는, 깔끔한 흰색 원피스를 몸에 대어 보며 소녀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고르고 있었다. 드레스 룸에는 닮은 듯 다른 디자인의, 재질이 좋은 옷이 잔뜩 있었으나 웬만하면 새 옷을 입고 나가고 싶었다. 원피스를 마네킹에 입혀 놓은 소녀가 크롭탑은 어떤 색이 좋을까, 고민 끝에 세 벌의 옷을 꺼내 벽에 걸어 보았다. 주홍색과 군청색, 카키색의 크롭탑은 각각 기장도 조금씩 다른데다 디자인 자체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소녀는 파파라차를 닮은 주홍빛 크롭탑을 들어 원피스를 입힌 마네킹에 끼워 넣었다. 브이 넥 칼라에 앞이 짧고 뒤가 긴 크롭탑이 제법 어울렸다. 밴딩 처리를 한 7부 소매도 마음에 들었다.

 

미츠이시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드레스 룸에서 나와 거실 소파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치마루 긴에게서의 전화였다.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이치마루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어났나?

 

일어난 지 한 시간이나 지났어요. 데이트 하는 날이니까, 신경 써야 하잖아요? 예쁘게 입고 나갈 거예요!”

 

이치마루는 방금 일어난 듯 했다. 아직 점심도 안 드셨나 봐요? 하는 질문에 느릿하게 그렇제……, 하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소녀가 씩 미소를 지었다.

 

얼른 점심 드시구, 이따가 봐요. 알았죠?”

 

통화가 종료되면 소녀는 마네킹에 입혀 놓았던 원피스와 크롭탑을 들고 드레스 룸을 빠져나온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두고, 주얼리 케이스를 열어 귀걸이를 고른다. 날개를 편 까마귀 모양의 흑요석 귀걸이는 소녀가 이치마루에게서 처음 받았던 선물이었다. 눈이 있는 부분에 작디작은 루비가 박혀 있는 것도, 모양이 까마귀인 것도 마음에 들었으나 그 무엇보다도 이치마루 긴의 선물이라는 점이 가장 사랑스럽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인 스와로브스키 귀걸이는 한 쌍에 2만 엔이 넘었다. 오늘은 이걸 할까, 가만 생각을 하던 소녀는 다른 것을 볼 생각도 않고 처음 눈에 들어온 귀걸이를 꺼내 놓았다.

 

봄 거리를 거닐며 함께하는 데이트는 오랜만이랄까. 소녀는 이치마루와 함께 풀밭에 앉아 햇빛을 쐬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좋아하는 여자 가수의 신곡을 흥얼거리며 미츠이시가 풀어헤친 머리를 곱게 빗어 올렸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봄의 햇빛이 악동마냥 뛰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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