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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모음/백사적오

[긴뮤지] 에피타이저

..,,,..,.,., 2016. 2. 13. 03:43

[긴뮤지] appetizer

 

w. 리네

 

1.

 

축하해요!”

, 그래 귀에 대고 소리 빽빽 질러뿌면 내 기절한다…….”

에이, 무슨! 제가 맛있는 거 해 드릴테니까요, 오늘 집에 가도 되죠? 부회장님?”

그 호칭 윽수로 어색하구마……. 오지 말라캐도 올 끼 뻔한디 뭐 할라고 거절을 하겠나.”

 

미츠이시는 마구 박수를 쳐 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해 볼 정도였다. 이 정도면 부끄러워 할 만도 하건만, 이치마루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벚꽃 색의 재킷을 어깨에 걸친 미츠이시는 이치마루의 어깨에도 채 닿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치마루는 버릇마냥 미츠이시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가끔 미츠이시는 깔깔 웃으며, 세례 받는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채 생각하지 못한 사이에 이치마루가 소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치마루 긴. 일본 대부업 계의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대기업 화이트론의 새로이 사장이 되는 사내였다. 동시에 화이트파이낸셜그룹의 부회장이기도 했으며 뒤로는 회장인 시호인 리호가 보스로 자리 잡고 있는 야쿠자 조직 칸나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세 호칭 모두 오늘에서야 물려받게 된, 새로운 호칭이었다. 일본의 뒷골목을 누비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어 봤을 그 이름, ‘백사(白蛇)’ 이치마루 긴. 화이트 슈트에 늘 블랙 계열의 우산을 들고 다녀서, 멋 좀 부려 보고 싶다는 동네 깡패들은 킹스맨이 개봉하기 전부터 이치마루를 따라 우산을 들고 다녔다. 별 볼 일 없는, 쓸모 없는 짓을 한다고 미츠이시가 자주 웃어댔다.

 

케이크는 뭐가 좋을까요? 치즈? 초코? 딸기?”

……, 치즈.”

 

미츠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올려 땋은 머리가 고갯짓과 함께 흔들렸고, 머리를 묶은 부분에 꽂은 리본에 달린 비즈가 찰랑이는 소리를 냈다. 석류알과 루비를 갈아 넣은 듯 반짝이는 소녀의 두 눈을 내려다보던 이치마루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부회장 임명식이 괜히 거창해서, 종일 허리를 쭉 펴고 있느라 고역이었다. 이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2.

 

! 샤또 리외섹 2006년산!”

 

소녀가 조심스레 와인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짜잔, 하며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이치마루도, 미츠이시도 좋아하는 와인이었다. 위스키는 버번, 칵테일은 민트 줄렙. 웃기게도 둘은 꽤나 취향이 겹치는 쪽이 있어서, 항상 바에 가면 같은 것을 주문하곤 했다. 가끔가다 미츠이시가 다른 칵테일을 주문하고는 했으나 자주 가는 바에서 이치마루와 미츠이시는 민트 줄렙 커플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버번에 애착이 깊었다. 그러나 버번보다도 먼저 사랑하게 된 술이 있다면, 그것이 샤또 리외섹이었다. 와인을 자주 마시지는 않았으나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선호하는 것까지 둘은 똑 닮아 있었다.

 

좋죠?”

당연한 걸 묻나.”

 

이치마루가 킬킬대며 와인 잔을 닦았고, 곧이어 잘 닦여진 매끄러운 와인 잔의 가장자리를 타고 와인이 찰랑였다. 와인을 따라 놓고 미츠이시는 다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큰하게 고소한 냄새가 나더니 이내 돌아온 미츠이시가 쟁반 위에 있는 요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파스타와 샐러드였다.

 

오오, 게살 로제 파스타.”

빙고!”

 

미츠이시가 깔깔대며 빈 쟁반을 들고 도로 총총총 뛰어갔다. 며칠 전 이치마루가 무심결에 먹고 싶다며 말을 뱉었던 음식이었다. 아마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레시피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터.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가 잔을 기울이는 동안 미츠이시가 이번에는 다른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접시의 뚜껑이 덮인 상태라 내용물을 알 수가 없었다. 뭐꼬? 하고 물어오는 이치마루에게 소녀는 손가락을 쉿 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가져다 대고는, 앞치마를 풀어 의자에 걸친 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맛 봐요. 짜진 않을 거예요!”

 

이치마루가 포크로 면을 감아 입에 넣었다. 연한 게살이 부드러운 면과 함께 씹히는 질감이 나쁘지 않았다. 로제 소스가 가득이어서, 촉촉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어때요? 괜찮죠? 하는 소녀의 물음에 이치마루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참한 색시 감 아니에요?”

, 머라카나. 식기 전에 니도 들어라.”

~ ~”

 

입술을 비죽 내밀며 미츠이시도 파스타 면을 휘감아 입에 넣었다. 미츠이시는 게살보다는 새우 쪽을 좋아했지만, 그 어떤 취향보다도 이치마루가 원하는 메뉴가 우선이었다. 요 사흘 동안 이 메뉴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몇 번이나 요리를 해 먹었는지, 그럼에도 오늘은 특별히 소스의 풍미가 깊어서 처음 했던 파스타와는 다르게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토마토의 향이 연하게 나고, 잘게 찢어 놓은 게살도 새우 못지않게 맛이 있었다.

 

부회장님.”

 

미츠이시가 제 앞의 사내를 불렀으나 한 동안 답이 없다가, 겨우 어?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호칭이 어색한가 봐요? , 그렇제……. 적응하셔야죠! 그렇겠제……. 소녀가 샐러드 접시를 이치마루 쪽으로 밀어 놓았다.

 

사과랑 호두를 넣었어요. 감을 넣을까 하다가, 마음에 드는 게 없길래. 먹어 봐요.”

뮤지…….”

?”

소스가……, 키위,”

에에, 어린애처럼 그럴 거예요? 걱정 마요! 골드 키위로 갈아 넣었으니까요.”

 

골드로? !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 햇님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이럴 때를 보면 영락없는 평범한 소녀와 같아서, 칸나의 몇몇 조직원들이 그녀가 뛰어난 킬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치마루는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호두 알갱이가 씹힌다. 미츠이시의 요리 실력은 훌륭하지는 않았으나, 꽤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습득력이 빠른 덕인지 두어 번 연습을 하고 나면 쉽게 요리를 만들어 놓았고, 요리 외의 다른 부분에서도 그랬다. 책을 읽기 싫어한다는 점을 빼면 나름 훌륭한 쪽에 속했다.

 

상큼하네.”

 

고마워요! 하고 미츠이시가 또 까르륵 웃어대며 손을 뻗어, 뚜껑이 덮인 접시를 이치마루의 앞에 놓았다. 열린 뚜껑 안으로 수란을 올린 햄 스테이크가 보였다. 호박, 당근, 옥수수 등 여러 야채를 볶아 가지런히 둘러놓은 외견이 귀여워 보였다. 니는?

 

전 파스타만으로도 배가 불러서요!”

 

미츠이시는 그리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다.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치마루가 나이프를 들어 햄을 자르는 동안, 소녀는 다시 파스타 면을 휘감아 입에 넣었다. 특별하게 잘 하는 것은 없었으나 미츠이시는 꽤 많은 요리를 할 줄 알았다. 전부 이치마루 덕분이라고 해 둘까. 견과류와 곶감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이치마루의 식성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에는 딱딱하고 퍽퍽하다며 먹기 싫어했던 것들을 지금은 잘만 먹었다. 맛있는 곶감을 고르는 법도 터득한 지 꽤 오래 되었다.

 

파스타 접시를 비운 후에 미츠이시는 와인 잔을 들었다. 토파즈를 풍덩 빠트린 빛깔의 물결이 찰랑이다가, 그녀가 잔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자 서서히 잔잔해졌다. 달짝지근한 꿀의 향과 민트를 넣은 듯 화끈한 아로마의 향이 강하게 섞여 정신을 맑게 해 준다. 거의 반년 만에 마시는 와인인지라 2006년산을 공수하겠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이치마루가 햄 스테이크 접시에 있던 볶은 호박을 다 먹어갈 때 즈음 소녀가 일어나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케이크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이건, 뽀뽀해주면 줄 거예요.”

 치사하구마…….”

 

내키지 않는다는 말투로 이치마루가 투덜댔으나 휴지를 들어 입을 한 번 닦고는, 제 얼굴 앞으로 쑥 들이민 소녀의 볼에 이내 입술 도장을 찍었다. 꺄아! 미츠이시가 동동 발을 굴렀다. 누가 보면 지구 정복이라도 성공한 줄로 착각을 할 표정이었다. 소녀가 조각 케이크를 꺼냈다.

 

화이트 초콜릿을 바른 리코타 치즈 케이크에요. 며칠 전에 가게에 가서 먹어 봤는데, 꽤 맛있더라구.”

 

두 조각이 예쁜 일회용 접시에 담겨 있었다. 이치마루의 앞에, 그리고 제 자리에 하나씩 케이크를 올려놓은 미츠이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른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처럼, 매끄러운 화이트 초코가 치즈 크림을 감싸 안았고 미츠이시의 눈동자처럼 새빨간 석류 알이 몇 개 올라가 있었다.

 

!”

 

별안간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 뭐꼬?

 

우리, 짠 안 했잖아요?” 

아아?”

건배를 깜빡했어요! 으으!”

나 참, 뮤지.”

일단 짠, 하고 말해요!”

 

소녀가 와인 병을 들어 다시금 술을 따른다. 찰랑, 적지 않은 양의 와인이 잔에 담긴다. 와인 잔을 식탁 가운데로 먼저 들어 올린 미츠이시를 보며 이치마루가 실없이 웃음을 흘리다 이내 제 잔을 들어 짠, 하고 부딪힌다. 건배! 부회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하며! 미츠이시의 당찬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해가 땅으로 떨어지는 저녁이었다.

 

3.

 

회장님이 뭐라고 하셔요?”

머라 카긴. 잘 해뿌라 카제.”

 

불도 켜져 있지 않은 방에서, 이치마루가 미츠이시를 품에 안은 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 이거 어때요? 스크롤을 내리던 이치마루의 손을 소녀가 멈췄다. 물처럼 투명한 아쿠아마린이 박힌 백금의 넥타이 핀이었다. 난 이게 좋아, 하고 말하는 미츠이시에게 이치마루가 입을 비죽 내밀며 반문했다.

 

내 선물 아이었나?”

내가 주고 싶은 걸 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른가?”

 

그럼요! 소녀는 뭐가 좋은지 마냥 까르르 웃어댔다. 어릴 적부터 웃지 못하고 자라기라도 했는지, 이치마루의 앞에서는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어대는 것이 소녀의 매력이었다. 미츠이시가 톡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손가락 사이에서 마우스를 빼들더니 고개를 돌려 이치마루를 마주봤다.

 

이거로 드려도 되죠?” 

거절해뿌면 우짤긴데?”

뭘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신담. 이거, 취향이잖아요?”

 

미츠이시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심플한 디자인에 곡선 없는 일직선의 모양, 그리고 아쿠아마린의 색도 마음에 들었다. 이치마루는 킬킬대다가, 소녀의 이마에 장난스레 꿀밤을 날렸다.

 

헤헤, 살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소녀는 다시 돌아앉았다. 이내 마우스를 딸깍댄다. 소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왼팔을 풀어 목운동을 하며 이치마루는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다. 3월의 세 번째 목요일, 9시 정각이었다.

 

4.

 

그래서요? 말씀드려 봤어요? 제가 부회장님 비서 하겠다구 한 거.”

윽수로 괴롭히는디, 말 안하고 배기나?”

어땠어요? 답은? 그러래요?”

참고는 해 보긋다 카시더마.”

 

긴장되네, 소녀가 중얼거렸다. 이치마루와 미츠이시는 소파에 앉아서 나란히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거실을 하늘빛 조명이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별안간 이치마루는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렇게 있으면 팔 아플걸요?”

 

소녀의 충고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치마루가 게임에 열중했다. 한참 열중하던 와중에 그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얼굴을 강타한다. 아악! 짧게 소리를 지르자 미츠이시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몸을 바르르 떨었다. , 니 웃기나? 이치마루가 코를 잡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이상한 목소리로 화를 내 오자,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제 폰을 소파에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회장님 말이에요, 사랑받는 거 엄청 좋아하나 봐요?”

……?”

그쵸?”

 

소녀가 씩 웃어보였으나 이치마루는 반문을 할 만한 변명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고, 소녀와 함께 있으면 제가 웃을 몫까지 죄 그녀 혼자 웃어주는 것 같아 나름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치마루 긴은 열 셋의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은 이들 중의 한 명에 속했으니 딱딱한 교육과 뜨거운 살인 현장에서 웃을 거리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후계자 교육을 받던 가 살해당했던 스물여섯의 그 날 밤, 모로하시 미나의 암살로부터 그를 지켜낸 것은 조직에 들어온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신참 중의 신참, 미츠이시 뮤지였다. 제가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도 모를 만큼의 일개 조직원에 불과했던 소녀는 그 공을 인정받아 빠른 속도로 진급했었지.

 

오래 지났네요.”

 

소녀가 다짜고짜 앞뒤를 뚝 잘라먹고 말을 내뱉어서, 이치마루는 여전히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회장님이랑, 처음 만난 것 말이에요. 그르나? 벌써 4년이나 지났죠. 그 날도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초봄이었으니까.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듯 소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미츠이시가 웃지 않는 시간을 뽑으라면 싸움이 있을 때 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치마루가 보기에는 그랬다.

 

어렸을 적의 그녀는 약해 보였던 것일지, 미츠이시의 부모는 그녀에게 공수도와 검도를 배우게 했더란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시작했던 운동에 그녀는 소질이 있었고, 전국 대회에도 두어 번 나간 적이 있었다. 상을 따기까지는 무리였던 것 같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소녀는 카포에라를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 미츠이시 카이토를 따라 사격장에도 함께 다녔으니 장래는 스턴트 우먼이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친구들의 추천을 받았더랬다. 그럴까? 책은 따분하니까. 그 때에 미츠이시는 늘 이렇게 답했다.

 

타고난 머리가 뛰어난 것일지, 적응력과 습득력이 좋은 것일지 미츠이시는 처음 배우는 것에도 쉽게 적응하고 이해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르는 액션과 사극이었고, 중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소녀였다. 얼굴도 꽤나 귀엽고 예쁘게 생겨서,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액션 영화에 얼굴을 가린 자객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조금은 특별하고 활기찬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항상 마당발이었고, 쉬는 시간에는 가장 먼저 매점에 달려가기도 했고 점심을 먹고 가끔은 남학생들에게 농구 수업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에도 욕심이 많아서, 담요를 허리에 두르고 책상에 비즈를 늘어놓은 채 목걸이를 꿰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녀였다. 물론 지금도.

 

함 물어봐도 되긋나?”

뭘요?”

사람은, 우짜다 죽이기 시작했나, 뭐 이런 질문.”

 

소녀가 고개를 숙여 제 무릎을 벤 이치마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하는 표정이어서 서둘러 질문을 거두려던 이치마루는 느닷없이 허리를 숙여 제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오는 소녀의 당돌함에 할 말을 잃었다.

 

글쎄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소녀가 볼을 긁적였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새빨갛게 자국이 일었다. 멍하니 긁어대던 손을 이치마루가 잡아채 꼭 잡아주자, 미츠이시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5.

 

내일 봐요, 부회장님!”

 

차에서 내린 소녀가 열린 창문을 통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치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총총 뛰어 자택의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지금은 혼자 사는 커다란 저택이 무섭지도 않은지-애초에 킬러에게 그런 소녀다움을 기대하는 것이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미츠이시라면 왠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커다란 대문이 닫히자 이내 대문 밖에서 차 소리가 멀어져갔다. 미츠이시는 대문 위의 자동 센서가 달린 등이 꺼질 때까지 한참이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밤의 봄 날씨가 춥다는 것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몸을 움직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을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었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이고 이어지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린다. 지금은 일이 바쁜가보네. 소녀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는 침실까지의 어둠 속을 걸었다.

 

38구경 리볼버가 든 레드 컬러의 프라다 숄더백을 대충 화장대에 던져두고 소녀가 침대에 곧바로 누웠다. 피곤해. 다른 조직과의 전쟁이 있던 날에도, 하룻밤 동안에 이치마루를 암살하려 찾아온 킬러가 세 명이나 되었을 때에도 피곤이라곤 느껴본 적 없는 소녀였으나 이치마루의 질문을 듣는 순간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우짜다 죽이기 시작했나? 미츠이시는 제가 늘어놓았던 말들을 되씹어 보았다.

 

사실은요, 정말로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별로 없어요. 아직까지도. 언제였더라? 저녁이었어요. 엄청 화가 난 채로 집에 가고 있었는데, 골목을 지나다가 어떤 아저씨한테 입은 막히고, 손목을 잡혀서 끌려가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그 때……, 뭐랄까,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멍하니 있다가 덩치 크고 문신을 잔뜩 새긴 아저씨들이 대여섯 명이나 있는 곳으로 끌려가버렸어요.”

 

그래. 그 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어느 골목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고, 저를 끌고 간 중년의 남성이 무슨 색으로 염색을 했었는지도, 그가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날은 도장을 가지 않고 아마 친구와 싸웠거나 누군가에게 얼토당토않은 시비를 들어서, 기분이 잔뜩 나빠진 상태로 집에 가고 있었을 것이었다. 길목에 아무도 없었고, 오직 혼자 걷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덩치 큰 사내에게 어디론가 끌려갔었지. 세라복 리본을 푸르고 교복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킥킥대는 사내들이 제 가슴을 만지기 전까지는, 소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기분 나쁜 감각이 있고 나서야 소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이내 제 시야에 멍청하고 더러운 웃음을 짓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소녀는 살짝 굽혔던 무릎을 냅다 펴서 쳐올리며 사내의 고간을 강타했다. 으아악, 하면서 앞에 있던 사내가 무릎을 꿇었는데- 그 이후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제게 휘두른 칼을 뺏어다가 그대로 이마 정 중앙에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 그것이 소녀의 첫 살인이었다. 사내의 이마에 꽂혔던 칼은 이내 뽑혀 다른 이들의 목이나 심장에 꽂혔었고, 결국 미츠이시는 그 날 다섯, 혹은 여섯 명의 중년 남성을 살해하고 말았다.

 

공수도도 배우고, 검도도 배웠고, 카포에라와 사격까지 배웠어요. 호신술 정도야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 날은 왜였을까요? 그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냥 화가 났을지도 모르고, 혹은 너무 당황해서 사람을 기절시키는 법을 잊어버렸던 것일지도 몰라요. 칼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죽여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구요. 몰라요. 이유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죽였어요. 정신줄이 나가 버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거예요. 손에 묻은 피는 공원의 수돗가에서 닦았고, 피가 묻은 교복을 감춰야 해서 아마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 걸쳤던 것 같아요. 끝이에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멀뚱멀뚱 주시하던 미츠이시는 허리를 펴고 일어나 앉았다. 머리에 꽂았던 리본을 빼낸 후 땋았던 머리를 풀어 앞머리까지 뒤로 넘겨서는 꽉 묶고, 세안용 헤어밴드를 한다. 핫팬츠와 크롭 탑을 벗고, 브래지어와 스타킹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화장대 의자에 놓인, 품이 큰 실크 소재의 원피스를 걸치고 입었던 옷들과 새 속옷을 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화장 솜에 리무버를 묻혀 붉은 아이 섀도우와 마스카라, 아이라이너를 지워냈다. 세면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얼굴에 적시자 그것만으로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물을 몇 번이고 얼굴에 문대고는 폼 클렌징을 들어 짠다.

 

폼 클렌징 거품에서 바나나 향기가 났다. 부드럽게 얼굴을 문지르자 새하얀 거품이 퐁퐁 터져 나갔다. 거울을 보며 눈을 몇 번 꿈뻑이다가, 비눗물이 들어갈까 싶어 소녀가 거품을 헹궈냈다.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강하게 터져 나와서, 소녀의 손을 벗어나 넘치는 것이 절반이다. 깨끗하게 얼굴을 헹궈낸 소녀는 얼굴의 물기를 닦더니 이내 욕실의 수납장을 열었다. 종이봉투에서 네 등분이 된 입욕제를 꺼내어 욕조에 던진다. 러쉬, 빅 블루. 소녀가 좋아하는 배쓰 밤이었다. 욕조 안에서 작은 바다가 만들어진다.

 

파란 물속에 소녀가 벗은 몸을 담갔다. 레몬 오일의 상큼한 향이 그녀를 끌어안아 다독였다. 한적한 바다에는 오직 미츠이시 뿐이었다. 이따금 해초가 담근 몸 주위를 떠돌다가, 물결에 실려 밀려났다. 소녀가 그대로 잠수한다. 옅은 바닷속에서, 어릴 적의 그녀를 마주한다.

 

6.

 

이치마루 긴은 소녀가 두고 간 리코타 치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새벽 2, 재방송도 유달리 재미없는 프로만 방송하는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과음은 절대, 절대 안 된다고 미츠이시가 충고를 한 탓에 맥주 대신 페퍼민트 티를 곁들일 수밖엔 없었다. 그래서요? 말씀드려 봤어요? 제가 부회장님 비서 하겠다구 한 거. 소녀의 목소리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 그에게 다시 물어왔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답했었나.

 

윽수로 괴롭히는디, 말 안 하고 배기나?”

 

사실 이치마루는 시호인 리호에게 호출을 받아, 무릎을 꿇은 채 새로운 후계자이자 화이트파이낸셜그룹의 부회장 자리에 임명을 하겠노라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운을 띄웠다. 비서는 미츠이시 뮤지가 좋을 것 같다고, 고려해 주시겠느냐고. 소녀가 자신이 비서를 하겠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부탁을 좀 드려 보라고 말을 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 알았다. 함 말씀은 올려 보긋다. 대충 이런 대답을 하며 넘어갔고, 이치마루의 비서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면 결정이 될 터였다. 대놓고 표현을 하지 않아도 이치마루가 소녀를 많이 아끼고 있다는 것은 미츠이시 또한 알고 있었다. 서로 장난스러운 거짓말을 쳐 대면서,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이런 맛에 그녀를 곁에 두는 것이기도 하고.

 

동이 트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부회장으로서의 첫 출근이기도 하니 지각은 해선 안 되겠지. 이치마루가 먹던 케이크를 접시와 포크까지 냉장고에 넣고는 다리를 끌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소녀가 뿌려놓은 섬유유연제의 바닐라 향이 진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가끔 미츠이시와 함께 눕기도 하는 이 침대는 킹사이즈인 탓에 그 혼자 누워 자기에는 큰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외로운 침실을 싫어하지 않았다. 침대 옆의 하늘빛 은은한 조명을 끄고, 손을 뻗어 더듬더듬 베개를 찾아 베고는 이불까지 반쯤 덮은 후에야 이치마루는 잠들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흑색의 침대에 하얗게 마른 사내가 누워 꿈속을 헤엄쳤다. 318, 금요일. 백사적오(白蛇赤烏)의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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