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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쥰지리호] 천화 내리신 날에

 

w. 리네

 

부인. 이제 끝이 보이는 듯 합니다.”

 

동도 트기 전의 이른 새벽이었다. 곁에 누워 있던 제 여인을 깨우며 쥰지는 시종들을 불러 마지막 단장을 시작했다. 잠결에 저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를 들어 눈을 뜬 리호는 침의를 벗고 빛깔이 좋은 옥색 의복을 걸치는 쥰지의 옆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 주세요.”

 

쥰지의 다정한 부탁에 여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내 무릎을 펴고 일어나더니 여종 몇 명과 옆방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둘 남은 시종에게 쥰지는 각자 샤미센과 다과상을 가져올 것을 명했고, 서랍을 열어 부인이 선물했던 공작석 장신구를 꺼내 손목에 둘렀다. 방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에는 이내 찬 기운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얗게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떠나는 길에 하늘이 축복이라도 내려 주는구나. 시야에 보이는 나뭇가지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이내 가지가 부러질 것도 같았다. 연약하지 않다면 잘 버텨내리라.

 

꿈결에 얼굴 없는 사내를 만났다. 몇 갈래나 갈라진 목소리로 떠날 채비를 하라, 말을 했으니 필시 죽음을 맞이할 시간을 준 것이렷다. 허면 쥰지의 답은 하나였다.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을 눈에 담고 스러지겠노라. 몇 번이고 생각을 해 왔으나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나니 조급해졌다. 실지로는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부인의 단장하는 시간이 천 년은 흐른 것 같았다. 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추운 것도 알 수 없었다. 감각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시종 한 명이 샤미센을 들어다 이부자리 옆에 놓고 사라진 후에 다과상이 들어왔고, 그 후에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부인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 닿았다.

 

낭군님, 들어갈까요.”

.”

 

쇼지가 열리며 차려입은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가채와 화려한 수가 놓인 기모노, 그리고 온갖 장신구까지, 얼핏 보면 하늘에서 쥰지의 목숨을 거두러 내려온 천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었다. 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가꾼 듯 보였다. 사박사박 옷감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리호는 쥰지의 곁에 와 무릎을 꿇어앉았다. 쥰지는 그녀에게서 과일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리호가 고개를 숙이면 머리에 엇갈리게 꽂아 넣은 비녀의 장신구가 찰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몸에 걸친 밝은 하늘 빛깔의 비단에는 은실과 금실로 화려한 모란이 수놓아져 있었다. 잘 하지 않는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걸치고 있음이 무엇보다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산호와 사금석, 그리고 수정으로 치장한 여인은 목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무거운 가채에 가득한 장식을 얹고 있었으나 전혀 흔들림 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제 낭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라도 하셔요, 낭군님.” 

……아름답습니다, 부인.” 

그렇습니까.” 

.”

 

다행입니다, 하며 여인이 쥰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감촉이 제 것과는 달라 그는 목 아래에 칼날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찬 기운을 느꼈다. 리호는 열어 놓은 창문을 닫으려 하다 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천화가 떨어지는군요.” 

이 사람을 마중이라도 나왔나봅니다. 천인만큼이나 어여쁘신 부인도 있으니 이곳이 극락일지도 모르겠어요.” 

낭군님 말씀은 이런 날까지도 향기가 납니다.”

 

리호가 요 옆에 놓인 다과상을 끌어다 쥰지의 앞으로 찻잔을 놓았다. 왼손으로 바른편 팔을 받치고는 찻물을 따르는 모습을 쥰지는 하나도 빠트리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오늘로서 부인의 이런 모습도 마지막이겠습니다,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린 쥰지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적이었으나 리호는 입가에서 미소를 떨구지 않았다. 그저 제 찻잔도 가득 채우고는 드시지요, 하고 말을 할 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제 30년이 되는 해였으니 앞으로 기나긴 세월동안 다른 사내를 낭군으로 맞을 일은 없을 성 싶었다. 리호에게도, 쥰지에게도 서로는 사랑의 맹약을 맺은 부부 이상으로 중요한 인사였다. 쥰지에게는 눈을 감기 전까지 아름다운 추억을 빚어 준 여인이 그녀였으며, 리호에게는 제 야망을 응원하고 받아들여 준 사내가 그였다. 서로를 대신할 수 있을 존재가 어디에 또 있으리. 여인은 제 첫 사내와의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담담히 웃어보였다.

 

찻잔을 든 쥰지의 손끝이 새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죽음이 당장이라도 쥰지의 눈앞을 가리고 그를 업어갈 것 같았다. 쥰지의 손끝을 가만 응시하던 리호는 옆에 있던 샤미센을 집어 들었다.

 

누우셔요. 샤미센을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제 낭군이 몸을 누이자 여인은 혼례식이 있던 날보다도 화려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 선율을 타기 시작했다. 내리는 눈이라도 녹일 셈인지 섬세하고 따뜻해 불안을 없애 주는 곡조였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여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제 부인의 뒤로 얼굴 없는 사내의 환영을 보았으나, 죽음을 앞둔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미인은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으로 초승달만큼이나 가녀리게 웃고 있었다. 죽을 사내를 맞이하러 내려 온 천화가 눈물이 되어 녹을 아름다운 연주가 일각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리호는 문득 입을 열어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호인 가문의 사람이 되었던 이튿날에 신의 목소리를 지녔다 하던 가희에게서 배운 노래였다. 청렴하고 아름다운 자에게 불러 주는 노래라고 했던가. 참으로 따뜻하구나, 여인에게도 닿지 않을 만큼의 작은 소리로 쥰지가 중얼거렸다.

 

낮게 흔들리던 쥰지의 영압은 리호가 노래를 채 끝내기도 전에 이내 스러져 버렸다. 여인의 샤미센 소리가 일순 멈추어 흩어지다가 도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조금씩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리호는 마지막의 소절까지 부른 후에야 악기를 연주하던 움직임을 멎었고, 이내 제가 선물한 공작석 장신구를 찬 쥰지의 손을 붙잡았다. 생명의 불이 꺼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은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리호가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한 차례 떨렸으나, 슬픔을 담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여인은 여종을 불렀다.

 

장례를 준비하라 일러라. 성대하고 아름다워 정령정 너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야.”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도 펑펑 떨어지는 듯 했다. 함박눈이로구나. 낭군님은 이리도 아름다운 분이시었군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떨림도 없었으나 시체의 바른손을 쥔 여인의 두 손은 여전히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

 

저 꼴 좀 봐.”

 

이바 치카네는 언제나 시호인 리호를 보면 말이 험해졌다. 면전에 대놓고 욕이야 하지 못한다지만, 쥰지가 직접 작성한 유언장마저도 그녀가 조작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런 눈엣가시인 여인이, 성정이 곧기로 유명했던 시호인 쥰지의 장례식에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있으니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호인 가문의 사람이라 한들 지위로 보면 이바 자신이 윗사람이니,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그녀는 리호에게로 다가갔다.

 

장례에 상복이 아닌 옷을 입다니, 무슨 예의도 모르는 천한 행색입니까?”

 

이바의 목소리는 당돌했다. 리호의 머리 장식은 쥰지의 마지막 날 만큼이나 화려했고, 옷 또한 상복이 아닌 상아색의 기모노였다. 흰 빛깔의 겉옷에는 금실과 홍실로 커다랗게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커다란 가채에 꽂은 비녀에는 장미석과 포도석이 박혀 있었고, 동백과 작약이 머리에 내려앉았으며 귀걸이는 진주로 되어 있으니 그 행색이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장례에 참석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이바가 처음이었다.

 

이바 님이시군요.”

 

리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 노한 이바가 다시 한 번 상복은 어디에 두었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리호는 잠시 이바와 눈을 맞추다가 뒤에 서 있던 여종을 불렀다.

 

차라, 유언장을 가져오너라.” 

유언장? 누가 고쳤을지 어찌 알겠어요.”

 

이바의 목소리가 성난 암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틀어 올린 머리끝에 대충 꽂아 넣은 흑갈색의 원목 비녀와 화려한 가채 위의 보석으로 장식한 옥비녀가 나란히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바의 사패장은 옷의 주름 하나까지도 칼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면 기둥 하나쯤은 뽑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딱딱한 눈초리로 여종이 유언장을 들고 올 때까지 이바는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

 

차라, 라고 불린 여종이 리호에게 옥색 봉투를 내밀고는 이내 뒷걸음질해 제자리를 찾았다. 리호는 봉투의 입구를 벌려 잘 접힌 종이를 꺼내 이바를 향해 내밀었다. 이바의 손이 종이를 받아들어 촤악 하고 펼치자 주위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몇몇 조문객들이 종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바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리호는 가만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큰 소리로 읽어 주시겠습니까.” 

이런 거짓부렁을 유언장이라고 내미는 것입니까?” 

거짓이 아닙니다.”

 

리호는 거짓이 아니오,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해명하려 들어도 의심을 할 것이 분명하니 굳이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바가 종이를 구길 것 같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다시 유언장의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부인, 시호인 리호는 장례가 진행되는 49일의 밤낮동안 상복이 아닌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의 죽음을 위로할 것이오, 하는 문장에서 이바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으며 모든 재산과 권력을 나의 부인 시호인 리호에게 일임할 것이오, 하는 글씨 또한 시호인 쥰지의 필체가 맞았으니 그 구절에서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이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유언장을 리호에게 건네주었다. 건네주기보다는 던지는 꼴에 가까웠으나 리호 또한 다른 말이 없었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이바는 제단 앞에서 꽃 한 송이를 헌화대에 올려놓더니 장례식장을 휙 하니 빠져나갔다.

 

진정 꼬리 아홉이 모자랄 요사스런 계집이로군.”

 

이바의 중얼거림은 분명 리호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일부러 들리라고 하는 것인지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으며 미간을 꾹 눌렀다. 시호인 리호의 귓가에도 그 문장이 정확히 들어와 꽂혔다. 여인은 진주를 꿰어 만든 귀걸이를 만지작대다가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흘 전만 해도 낭군님의 베개가 있던 요에는 이제 리호의 베개밖에는 없었다. 이제 함께 이불을 덮을 사내가 없으니 비단 금침은 개어놓고 벚색에 흑실로 석산을 수놓은 솜이불을 꺼내어 덮어야 할 것이었다. 커다란 가채가 무겁게 목을 짓눌렀으나 가채를 벗으려 시종을 부르지는 않았다. 아직 장례가 끝나지 않았다.

 

시호인 쥰지는 죽음의 순간을 오로지 부인 하나만으로 가득 채웠다. 부인의 선물인 공작석 장신구만을 걸치고 떠난 그 옆에는 샤미센을 연주하며 노래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했던 부인이 있었다. 새벽의 등불에 의지해 분첩을 두드려 얼굴에 하얀 가루를 덧바르고, 붓을 들어 눈두덩에 나무 빛깔의 염분을 올리던 그 때에 여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여종들이 참빗으로 여인의 머리를 빗기고, 올려놓은 머리 위에 가채를 씌워 풍성한 머리에 금비녀 옥비녀를 엇갈리게 꽂아가며 아름다우셔요, 하고 칭찬을 할 동안에도 시호인 리호는 떨지 않았다. 그저 잘 하지 않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죽 늘어놓고는 어울리는 빛깔의 장신구를 찾아 다느라 여념이 없었지.

 

리호님.”

 

시집을 왔을 때부터 리호를 모시던 여종 차라의 목소리였다. 리호가 그래, 하고 답하자 차라는 쇼지를 열고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동백차를 내왔어요.” 

고맙구나. 두고 가거라.” 

리호님…….” 

할 말이 남았나보구나. 무슨 일이야.”

 

저기, 그게, 하며 차라는 제 갈빛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말하기 어려운 청이라도 있는 것일까.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이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겨우 들릴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차라가 입을 열었다.

 

다들, 유언장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리호님이 말이어요…….”

 

차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리호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찬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귀가 새빨간 것을 보니 제가 무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인 줄은 알고 있어 보였다. 리호는 다정한 목소리로 차라, 하고 이름을 불렀고, 가까이 오거라, 하는 명을 내렸다. 차라가 꼼지락대며 리호의 곁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아니, 아니어요! 제가 어찌……!”

그래. 사실 그들이 무어라 믿든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던 차라는 제 주인의 묘한 대답에 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상아빛 기모노를 차려 입은 여인은 장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커다란 가채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커다란 장신구를 달고 있었고, 그 중 머리에 얹은 작약 모양의 장신구가 가장 눈에 띄었다. 어찌나 생화 같은지 향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먹을 갈고, 낭군께서 붓을 들어 유언장을 쓰셨어. 내 기억에는 정확히 남아 있단다. 허니 다른 누구의 말이 무어 신경 쓰이겠느냐. 그들 눈에는 그리 보이겠지.”

 

리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본래 사랑이 아닌 권력을 목적으로 한 혼인이었으니 욕을 먹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리호는 꽃잎을 말려 만든 향을 피워야겠다,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차라가 가져온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리호는 방을 둘러보았다.

 

이 방도 이제는 정리를 해야겠구나.”

아이들을 시켜 정리를 할까요?”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둘 것이야. 그래, 그것보단 벚색 이불을 내오렴. 금침은 이제 정리를 해야지. 이만 가보아라.”

 

, 하고 차라는 처음보다 밝아진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다시 방에는 리호 만이 남았다. 원하는 것을 가졌으니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단지 남은 것은, 죽음이 오던 날 자신이 제 낭군에게 그 언제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을지, 에 대한 의문이었다. 충분히 만족을 했어야 할 텐데. 아름다운 빛깔의 옷을 고르고, 어울리는 장신구를 단 그녀는 연습조차 필요하지 않은 다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샤미센 연주는 부족하지 않았을지, 불러 드린 노래는 듣기에 편했을지. 죽은 이에게는 그런 것을 물어볼 수 없는 것만이 지금의 리호에게 불편하게 가슴을 옥죄어 왔다.

 

몸이 천근같았다. 가채의 무게보다는 떠나간 자의 빈자리가 여인을 찍어 눌렀다. 저를 낳은 부모와 다정했던 오라비를 잃었을 때의 그녀가 그랬다. 떠나간 자의 빈자리는 슬프기보다도 허했다. 죽은 가족의 시체를 끌어다 마당 정중앙에 놓고, 햇빛이 떨어지는 아래 나무 장작들을 모아다 홀로 화장을 했을 때의 리호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시체가 발갛게 불타오르고, 이윽고 흑색 짙은 숯과 함께 재로만 존재하게 되었을 때에 여인은 아궁이 옆의 젖은 흙을 파내어 오라비가 숨겨 두었던 돈 주머니를 챙기고, 오라비의 방에서 오직 칼 한 자루만을 들고는 정령정을 향해 길을 나섰더랬지. 그로부터 지금까지 채 반백년도 지나지 않은 세월 사이에, 여인은 또 가족을 잃었다.

 

-

 

어린 계집종 몇 명이 그녀가 장례 동안에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며 실로 냉혈한이 아니냐 하고 저들끼리의 이야기를 쑥덕였다. 사십구재 회향을 하는 날이었다. 여인은 커다란 가채에 백금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남옥과 산호를 엮어 만든 귀걸이를 걸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가채에 홍련 세 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산호빛 비단 위에 걸친 겉옷은 봄이 온 듯 벚색을 뽐냈고, 허리에 두른 천은 진주를 꿰어 두른 띠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꽃의 향은 사흘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킬 만큼이나 진했다. 이 날 여인의 미색은 낙안 왕소군이 환생을 했다더라 하여도 믿을 만큼이나 뛰어났으며 그 아름다운 기운이 무섭기까지 하여 기록에 따르면 지옥 염라의 애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하였다.

 

차라야.”

, 리호님.”

탈상 후에 두견주를 내오너라.”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리호는 제 낭군의 자리를 책임질 여인이었다. 첫 날에는 저 행색이 무슨 행색이냐며 욕을 해 대던 장로들도 이제는 그녀의 화려한 기상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권력과 미색과 총명함에 천운까지 지녔으매 그런 여인을 등지는 것은 편한 길을 등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묵직한 가채를 머리에 이고도 여인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길을 걸었다. 비단옷이 무겁게 땅으로 떨어져 아름다움이 발끝마다 맺혔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을 법 한, 상복처럼 단정한 옷을 차려입은 노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누구신지요.

 

노인이 저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느라 바빴으나 여인은 반쯤 흘려 들었다. 살아생전의 낭군이 중요한 인사는 죄 소개를 시켜 주었으니, 초면인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회향이니만큼 심기를 정갈히 해야 할 것이었다.

 

막재의 회향을 앞둔 몸입니다. 이만 걸음을 옮겨도 될런지요.”

 

노인의 미간이 일순 찌푸려지는 것을 본 것은 리호 밖에는 없는 듯 했다. 노인은 금세 멋쩍은 듯 웃으며 예, 그러시지요, 하고는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었고, 잠시 멈추었던 리호가 걸음을 옮기자 차라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인은 그로부터 제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숨을 삼켰다.

 

-

 

차라야, 함께 술 한 잔 들겠느냐.”

 

? 의식하지 못한 새에 차라는 놀라 탄성처럼 답했다. 그리 놀랄 일이더냐. 리호가 웃으며 제 앞에 앉으라 손짓을 했지만 여종이 제 주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늘 얌전하던 차라는 안절부절 하며 몸을 떨었다. 괜찮대도, 하고 리호가 두 번을 더 달랜 후에야 여종은 새빨개진 얼굴로 여인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 불편하거든 술 한 잔 따르거라.

 

차라는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시키고 주병을 잡아 여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달큰하고 감미로운 향이 술잔 주변을 맴돌았다. 두견화의 향이 여인의 아름다움과도 잘 어울려서, 문득 제 주인이 빼어난 미색을 지닌 여인임을 실감하며 차라는 잠시 그 미모에 넋을 놓았다. 정말 왕소군 못지않으셔요.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다. 여인이 웃음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낮과는 달리 화려한 가채도, 장신구도 없이 오로지 풀어 내린 흑색의 머리칼뿐이었음에도, 여인은 연화, 혹은 난초에 빗댈 청초함을 빛내고 있었다. 그 속에, 아주 깊은 속에 요색 또한 여전히 존재했다. 칠칠재를 지낼 동안 매일 아침 여인의 단장을 돕고, 저녁에는 목욕 수발을 들었던 차라가 매번 하는 생각이었다. 주인의 미색에 취해 있는 사이 리호는 차라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견주는 피로 회복에 효험이 있단다.”

정말, 소녀가 함께 하여도 되어요?”

그럼. 재를 지낼 동안 네가 많이 바쁘지 않았더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다.”

이년에게 그리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차라는 얼른 한 잔 들라는 리호의 미소에 조심스레 술잔을 들어 비웠다. 조청을 넣은 듯 달큰한 향이 났고, 맛 또한 깊이가 있었다. 여인이 가향주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지난 봄 저가 직접 두견화 꽃잎을 따 담갔던 술이니만큼 차라 또한 이 술에 애정이 깊었다. 다시 채워진 술잔에 차라의 얼굴이 흔들리며 담겨 있었다. 여인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손바닥보다도 작은 칠기 함을 들고 돌아와 앉았다. 리호가 여종에게 칠기 함을 내밀었다.

 

받으렴. 선물이란다.”

 

차라가 일전마냥 토끼눈을 떴다. 왜 이러셔요? 급기야 이런 질문을 듣자 리호는 잠시 말이 없더니 후후, 하고 웃었다.

 

알고 있지 않느냐. 내일부터는 많이 바빠질 것이야. 너는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내 너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여라.”

 

여인이 직접 칠기함의 덮개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장미석과 비취를 은실로 엮은 장신구가 솜 위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어머, 하고 소녀다운 감탄을 하며 차라가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눈을 꿈뻑대며 여인이 무슨 말이라도 하시기를 기다렸다.

 

손에 차 보거라. 네 머리색이 연하니 너와 어울릴 것 같구나.”

 

팔찌를 집어드는 차라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평생 종살이 중 가장 값 비싼 선물이었다. 받아봤자 귀한 다과나 오래 묵은 조청 등 음식 종류였으니, 장신구를 선물로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바다를 담은 듯 신선한 빛깔의 비취와 꽃물을 들인 듯 고운 장미석이 얇은 손목에 멋들어지게 걸렸다. 역시 어울리는구나. 여인의 칭찬에 차라의 얼굴이 연지를 찍은 듯 새빨갛게 익었다.

 

감사합니다, 리호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려 자꾸만 손목을 만지작대는 차라를 보며 리호는 그래, 그래, 하고 답했다. 호롱불이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었고, 커다란 방의 가운데에 리호와 차라가 앉아 술잔을 몇 번 더 기울였다. 대취를 했다간 내일 일어날 때에 문제가 있을 것이니 이만 잔을 정리하라는 리호의 말과 함께 차라는 술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쇼지를 닫기 전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하다며 인사를 전했다. 여인은 따스하게 웃어보였다.

 

하얀 요 위에 누워 있던 리호는 문득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동이 트며 낭군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 날처럼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빛깔 좋은 등색의 침의를 걸친 여인의 팔이 창문 밖을 향해 뻗었고, 이내 여인의 손 위에 천화가 내려앉아 자취를 감추었다. 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리신 천화로 흰 가마 지어 타고 가시었구나.”

 

여인은 창문을 닫았다. 이내 호롱불이 스러지고 거대하고도 편안한 어둠이 여인을 끌어안았다. 여전히 겨울밤의 하늘에서는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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