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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 가르시아

[단문] 새로이

..,,,..,.,., 2016. 3. 20. 23:18

 

새로이

 

w. 리네

 

1.

 

그는 나에게 독이자 약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선한 적은 없었다. 나는 넓은 잿빛 성에서, 언젠가 누가 나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2.

 

살이 또 타들어간다. 아니, 타들어가는 듯 한 고통이다.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다 시선을 뜨거운 팔에 고정하면, 여전히 그 곳에는 살덩어리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이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다만 찾아오는 고통은 늘 가지각색이었고, 나를 흥미로운 듯 쳐다보는 그 금색 눈동자만이 오로지 같았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징그러운 사내다. 그 사내는 고통으로 인해 내 두 손이 나도 모르는 새에 발작처럼 떨리는 것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갈 뿐이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은 환각적 고통에 숨을 쉴 수 없어, 입술을 타고 침이 줄줄 흐를 때에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황금색 눈동자. 두 눈동자를 터트려버리고 싶다. 실험의 보조가 된 지 열흘 째였으나, 취급은 여전히 실험체와 동급이었다. 그는 마땅한 실험체가 없을 때에는 내 의사 따위 묻지도 않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여전히 나를 반쯤은 쓸모 있는 실험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약을 투입하는 고깃덩어리로 사용했다. 내가 회도를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나에게 상처가 나면 알아서 치료하라는 말을 했다. 나는 회도에 능하지 않았다.

 

자엘아폴로 그란츠. 이름 한 자 한 자가 살아 움직여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그는 분홍색 머리를 긁적이다가, 또 실패군! 하면서 서랍장을 뒤졌다. 그러고는 알약 하나를 내게 던진다. 익숙한 그 알약은 진통제이다. 마약성 진통제. 엄청난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약. 이 곳에 있는 몇십년 간 꾸준히 복용을 해 왔던 약이다.

 

살아 나가기를 원하는 본능 때문일까. 그가 내 몸에 주입한 독은 얼핏 세어만 봐도 백이 넘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던져주었지만, 그것에도 나는 중독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이 가슴 속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듯 했다.

 

3.

 

그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차오른다. 자엘아폴로의 영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때의 그 황홀함과, 믿기지 않아 얼굴을 몇 번이나 꼬집어보았던 일이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일들. 시야가 뿌옇게 변하면 소매를 들어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 호흡기 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산소를 더욱 빨리 들이켜가며 그의 잠긴 창고 속에서 누군가가 들어오기를, 나를 찾아주기만을 기다리던 그 벅참. 그리고 드디어 창고 문이 열렸을 때의-

 

나는 사패장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눈 앞의 사내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자였으나, 대장복을 입고 있었다. 드디어 정령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온 몸이 떨렸다. 힘을 쓰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호오, 자네 혹시, 4번대의 실종된 대원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였다. 제 이름은 시로미네 유키입니다, 그렇게 적혀 있을거예요, 절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급하게 쏟아내렸던 말들…….

 

4.

 

블랑카 가르시아. 나는 4번대로 돌아온 이후, 이름을 이렇게 수정해 주기를 요청했다. 자엘아폴로 그란츠에게서, 새로 받은 이름이었다. 중앙에서의 반대가 있을까 두려웠으나 의외로 내 요청은 쉽게 수락되었고, 나는 시로미네 유키의 이름을 버리고 블랑카 가르시아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밝히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든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에게서 배운 외과 수술 능력과, 처음 웨코문도에 갔을 때에는 시해조차 해방하지 못했던 참백도의 시해 해방 등으로 할 일이 쌓여만 갔다.

 

숨을 들이키면 여전히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몸 속으로 들어온다. 수술용 장갑을 낀 손에는 수술도구가 들려 있고, 내 앞에는 살가죽이 벗겨지고 창자가 뜯겨나가 급하게 회도로 긴급치료를 한 환자가 숨과 함께 피를 토하며 누워 있다. 이것으로 됐다. 다른 것은 더 필요하지 않다. 내가 살릴 환자가 누워 있고, 나는 돌아왔다. 다른 것은, 상관 없잖아? 지금의 나는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 장갑 위로 피가 튀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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