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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여름, 어머니께.

..,,,..,.,., 2016. 10. 2. 13:21

[츠메즈메 라카챠] 여름, 어머니께.

  

w. 리네 

 

1.

 

끼익. 이 방 문은 아무리 조용히 열어도 소리가 났다. 츠메즈메 라카챠, 2번대 9석의 방이다. 맑은 녹빛 눈이 어두운 사방을 휘 둘러보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사패장 대신 가벼운 유카타를 입은 모습이다. 미미하게나마 담배 냄새가 풍겼다. 소녀가 발을 옮겨, 촛대 앞으로 다가갔다.

 

다리를 굽혀 앉아 성냥을 찾더니, 불을 댕겨 촛불을 붙인다. 하나만으로도 온 사방이 환해져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소녀는 조금 즐거워 보였고, 조금 슬퍼 보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츠메즈메의 앉은뱅이책상에는 작고 그다지 비싸보이지는 않는 재떨이가 하나 있었다. 한쪽에 홈이 파여 담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쪽의 것이어서, 그녀는 어머니께 편지를 쓸 때 늘 거기에 불 댕긴 담배를 세워두곤 했다. 촛불을 켠 다음 바로 소녀는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피웠고, 언제나처럼 재떨이 위에 그걸 올렸다. 이제는 일기장을 펼 차례이다.

 

서랍을 열면 필통이 하나 있고, 일기장도 하나 있었다. 현세에서 사온 스프링 노트였다. 줄이 쳐져 있고, 동그랗게 말아놓은 철사로 종이가 고정되어 있어 처음 살 때에 신기한 얼굴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이 났다.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수직을 그리며 오르는 동안, 그녀는 주황색 일기장을 책상 위로 올려 펼쳤다. 이제 세 장밖에 남지 않았다. 사 두었던 새 일기장을 꺼낼 날이 머지않았다.

 

필통은 천을 말아 끈으로 묶어 놓은 것이라, 소녀는 언제 다시 현세에 나간다면 지퍼가 달린 필통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펼쳐 놓으면 열 가지는 넘는 색색의 볼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정과 빨강, 파랑은 세트로 구성된 것이었지만 초록, 주황, 보라, 분홍 등의 색은 알록달록한 볼펜이 좋아 그녀가 하나씩 따로 고른 것들이었다. 오늘은 보라색 볼펜을 집어 들더니, 펼친 일기장의 위에다 날짜를 적었다. 817, 수요일. 옆에는 소용돌이 모양 밖으로 일직선을 여러 개 붙인 해를 그려넣는다. 한 칸을 띄어 놓은 다음 줄에는, 어머니께, 하고 적었다.

 

2.

 

817, 수요일.

 

어머니께.

 

어머니. 제 이름은 츠메즈메 라카챠입니다.

 

3.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로 보내는 편지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이번의 편지는 한 달을 조금 넘겨 보내는 것이었다. 막상 글을 써내려가려니 정리되지 않는 문장이 많아, 소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 갖가지 생각은 눈을 감을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밖에선 아직 잠에 들지 않은 대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 가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손을 들어 글을 적어 내려간다.

 

오늘은 불꽃놀이를 보는 날이었다. 일을 일찍 끝내고 가끔 입는 예쁜 유카타를 꺼내어 입은 뒤에, 친한 선배와 함께 대사 지붕에 올라가 터지는 불꽃을 감상했었다. 옆에 앉아 있던 그는 한참동안이나 말없이 불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은 후회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소싯적 어린 동생의 죽음을 방관하여,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 아이가 불꽃놀이를 그리도 좋아해서, 여름 축제 때에는 언제나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집의 지붕에 올라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 눈물이 차올랐는지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츠메즈메의 손이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천천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누구나 가끔은 이유 없이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 다독임을 받자 그는 더 크게 울었다. 지붕 아래에는 분명히 누군가 앉아 있었겠지만, 우는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의 동생은 호로에게 죽임 당했다고 한다. 어리던 그가 겁을 먹어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아, 자신의 동생이 죽어버렸다는 말을 했다. 멱살이 잡힌 채 허공에 들어 올려졌을 때, 크게 소리를 쳐서 누군가를 불러들였다면 그 아이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다 또 목을 놓아 울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영력이 없는 루콘가의 일반적인 주민 중에 호로와 맞서 싸워 이길 만큼 강한 자는 흔치 않았다. 그가 주변에 도움을 청했더라도, 각자 몸을 지키려 더욱 숨어들을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츠메즈메는 등을 다독이던 손길을 멈추고, 천천히 그 손을 자기 무릎 위로 되돌려놓았다. 이제 그는 울지 않는다.

 

라카챠. 그래도 나는 후회하고 있어. 그 날 내가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을. 나는 언제나 그것만을 후회해.”

 

너는? 하고 그는 이제 츠메즈메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후회하는 것이 있어?

 

4.

 

함께 불꽃놀이를 보았던 선배의 이야기만으로 한 장을 가득 채우고, 소녀는 놀리던 손을 멈추어 잠시 종이 위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헤헤, 웃음을 흘렸다. 제 이야기를 하기가 망설여져 계속 남의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어머니께는 제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할 텐데요. 그녀는 다음 줄을 마저 적어 내렸다.

 

저는 아버지의 주검을……

 

소녀는 또 한 번 손을 멈추고, 이번에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손을 뻗어 서랍을 다시 열었다. 흰 띠지와 풀을 꺼내어,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가려질 만큼 잘라 풀을 바른다. 그러고 나면, 숨길 이야기의 위로 띠지를 올린다.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소녀는 입술을 씹었다. 늘 하던 이야기이다. 50년 동안의 일기장에는 이미 수백 번이 넘게 적어 놓은 이야기. 저는 아버지의 주검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적다 말고 숨긴 그 문장 위로 소녀는 보라색 볼펜을 들어 다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불꽃이 하늘에서 터질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갔습니다.

 

5.

 

매년 불꽃놀이를 보건만, 해마다 마음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보았고, 올해는 잔뜩 막힌 마음으로 그것을 보았습니다. 하얀 것과 녹색의 것, 붉은 것이 터져 검은 하늘에 꽃수를 놓는 것은 언제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저의 마음만은 늘 달라져 올해의 불꽃놀이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보았습니다. 내년의 불꽃놀이는 어떤 마음으로 보게 될까요? 내년에는 혹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어디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계십니까.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어머니의 낙원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해지겠습니다.

 

6.

 

평소와 같은 끝 문장을 적어내린 후 소녀는 딸칵 소리를 내어 볼펜의 심을 집어넣고, 그것을 필통 위로 올렸다. 천을 조심스레 감아 끈을 묶은 후, 띠지와 풀과 함께 서랍에 도로 넣는다. 책상 위에는 이제 다 탄 담배 하나와 재떨이와 일기장, 불 켠 촛대와 조금 주먹을 쥔 소녀의 두 손이 남았다. 츠메즈메의 녹빛 눈동자가,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움직여, 전하지 않을 편지의 내용을 되짚어보았다. 그 다음으론 일기장을 덮어 서랍에 넣고, , 바람을 불어 불을 끈다. 도로 어둠이 찾아왔다. 아직도 밖에선 잠 못 이루는 대원들의 담소 소리가 들린다.

 

소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펼쳐 놓았던 요 위로 몸을 누이기로 했다. 천천히 일어나 입은 옷을 벗어 내렸다. 고운 하늘빛의 천은 어릴 적에는 입어볼 수 없었던 꽤 좋은 옷감이었다. 그것을 천천히 개어 놓고, 침의를 몸에 걸친 후에는 푹신한 베개를 베고 눈을 감아, 뚜렷이 떠오르는 후회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조용한 반성과 후회, 여름 어둠으로 빨려 들어간 잔디빛 눈동자. 송신할 수 없는 마음의 반절을 적어내린 일기장이 서랍 안에서 숨을 죽인다. 여름의 밤은 짧다. 매섭도록 축축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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